처음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책의 표지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예쁘다, 와 아름답다,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예쁘다: (형) 1. (기본의미) [()] (대상의 색이나 모양이눈으로 보기에 좋고 사랑스럽다.

아름답다: (형) [()] (어떤 대상이즐거움과 기쁨을  만큼 예쁘고 곱다.

 

아름다운 것은 예쁘고 고운 것이고 예쁜 것은 좋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머릿속에 전자사전을 내장하고 있지도 않고 평소에 사전을 외고 다니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의 표지를 보며 느낀 감상이 예쁘다, 보다 아름답다, 였던 것은 아무래도 이 책의 표지가 차분하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무게감이 있으므로 러블리함보다는 고움 쪽에 좀 더 무게를 둔 단어 선택이었다. 

이 책을 읽은 건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지만, 다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우연함이 나를 이 책에게로 끌고 갔다. 막 이사한 집 주변을 걸어다니다가 서점을 겸하는 카페를 보았다. 무엇을 찾겠다는 마음도 없이 서가를 두리번거렸다. 새로 나온 책들을 주로 들여놓는 북카페 같았고 문학 섹션이 다양하지 않았는데 거기에 이 책이 있었다. 오톨도톨한 질감이 살아 있도록 초록색 천으로 마감한 하드커버 장정에 황동색 박으로 크기가 다른 여러개의 동그라미들이 겹쳐져 있었다.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조약돌들 같았다. 책을 펴보니 「파묘」가 나왔다. 그 단편을 황정은의 다른 소설집(『아무도 아닌』)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책은 이순일이라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다. 노인의 삶과 노인의 가족과 노인의 가족의 삶이 나온다. 노인은 전쟁통에 삼팔선 근처의 마을에서 살아남았다. 식구가 많은 친척집의 식모로 갔다가 시장 상인과 결혼해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고 살았다. 아들은 뉴질랜드로 건너가서 졸업과 취직을 앞두고 있고, 이순일은 큰딸의 시가 재산으로 되어 있는 빌라에 살면서 큰딸의 집안일과 자신의 집안일을 돌보고 있고, 작은딸은 독립해 살면서 노인의 기준으로는 "너 하는 것도 살림이냐"는 삶을 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앞 문단에서 말한 그대로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앞 문단에서 말한 내용을 전부 알 수 없다.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기보다는, 삶을 살다가 한 번씩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조각들을 건져내서 이야기를 짓는 것 같다. 그냥 살다가, 살다가 한 번은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면 그 이야기를 하다가 너 누구 아냐, 이런 말도 하게 되고, 그러면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지는데, 그러다 보면 또 삼천포의 삼천포로 이야기가 흐른다. 그러다가 마지막은 결국 말줄임표로 끝난다.

 

한 번도 말줄임표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책에는 여러 번의 말줄임표가 있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기억은 뚝뚝 끊겨 있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은 분명한 분절로 나타난다. 기억이란 게 원래 그렇다는 듯이. 삶이란 게 원래 그렇다는 듯이. 기억이란 자, 엄마, 이제 차분히 앉아서 엄마 이야기를 해봐. 뭐라고 말하든 다 들어줄게. 라고 한다고 해서 태어나 겪은 첫 순간의 기억부터 지금 딸과 마주앉아 있는 이 식탁의 기억까지를 줄줄이 시간 순서대로 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은 분명히 한다. 그렇게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은 오히려 소설의 행간에 있다. 이야기가 말하지 않는 부분에서 독자는 많은 것을 유추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도드라지는 것은 분절된 기억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에 관련된 것이다. 도드라진 어떤 기억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가짜 기억들을 갖게 되는지. 삶의 어떤 순간이 우리에게 남고 어떤 순간은 지워지는지. 한영진과 한세진과 한만수의 엄마 이순일은 학교에서 제대로 글을 배워본 적이 없고,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놓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남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기억뿐이다. 그런데 그 믿을 수 없는 기억이 이야기가 된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아무렇게나 섞어놓아도 한 사람의 일대기가 된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섞어놓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삶인지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이런 이야기를 오랜만에 읽는다는 생각을 했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현재의 고단함을 토로하지 않는 것. 그저 주어진 대로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귀하다. 삶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신 여기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고, 있었다고, 지금도 어디엔가 섞여 살아가고 있다고, 계속 툭툭 끊기고 뒤섞이고 몇십 년 전이 지금 같고 지금이 몇 년 전인 것 같은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고. 삶이 어떤 건지 꼭 말해야 하냐고. 우리보다 한두 세대 위의 사람들만 하더라도 삶이 어떤 건지 말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가진 내러티브가 분명히 있다고.

 

표지 디자인이 이 책에 대해서 말해준다. 그 자리에서 책을 집어 후루룩 다 읽고는 책을 사서 나오면서 표지에 대해 생각했다. 고리처럼 이어져 있는 네 편의 이야기들에 대한 표지였다. 때로 서로의 내러티브에 깊숙이 스며들고, 때로는 점을 찍은 정도의 작은 접점밖에 남기지 않아도 분명히 서로 겹쳐 있는 이야기들. 표지 위에 그려진 원들은 책에 실린 이야기의 수보다 많다. 사슬처럼, 표지의 맨 오른쪽과 맨 왼쪽에는 반으로 잘린 조약돌들이 있다. 이 사슬은 끊어지지 않은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 표지의 바깥쪽, 표지의 뒤쪽까지도 쭉 이어질 것이다. 

 

순자씨들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순자라는 이름을 가졌거나 순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우리의 어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태어나 자란 곳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떠나왔거나, 시장통에서 몇십 년 동안 시장통으로 출근하고 가게 위의 집에서 살고 잠드는 사람들이 모두 순자야, 순일아, 불리듯이. 모두의 집단적 기억과 개인의 특유한 기억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집의 내지에 황정은은 순자씨에게, 라고 적었다. 그 앞 페이지에는 작가의 서명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을 오래 바라보았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꾸 생각해보게 되었다. 늙어서도 무릎이 아프지 않고 두랄루민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반복되는 노동에, 오래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처럼 자꾸만 꼬이는 일상에 떠밀려 문득문득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모멸감이나 환멸이나 슬픔 때문에 마음이 눅눅하고 곰팡이가 슬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건강하다는 것은 몸을 말하는 것인가,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무튼 현재를 사는 일은 너무 고단하고, 그래서 나는 항상 나의 과거를 반추하고 나의 미래를 걱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그러니까 미래와 과거에 대해 걱정할 시간에 그냥 살라고 책은 말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일직선으로 정렬하고, 시간 순으로 늘어놓은 다음 그 이야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 시도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우리가 삶을 어떻게 끝이 닫힌 이야기로 만들고 우리가 "사는" 것을 방해하는지.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여기에서 지금을 살라고. 한 발짝을 바깥으로 떼어놓고,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어딘가로 가거나, 무슨 일을 하라고. 

그 메시지가 큰 위로가 되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무엇이나 뜨거운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묘를 파내자 지열로 인해 구덩이 속에서 뜨거운 김이 오른다. 요리를 하면 뜨거운 기름이 튀고, 나물을 삶은 물을 버리느라 손가락 위로 뜨거운 물이 흐르고, 시장을 걷는데 햇빛이 뜨겁고, 손에 든 갓 튀겨낸 꽈배기가 뜨겁고, 이모를 만나러 간 날은 무척 더워서 눈을 한껏 찡그리고 상대를 확인해야 하고, 순대를 파는 아주머니는 퉁퉁 붓고 빨갛게 익은 손은 달걀을 쥐듯, 뜨거운 것을 억지로 만지듯 순대를 썬다. 그렇게 오랫동안 순대를 썰었는데도 그것이 뜨겁냐고, 자신을 기억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지 잘 알 수 없는 예전의 시장통 친구에게 순자씨는 묻고 싶지만, 그것을 묻는 대신 순대를 집어서 먹는다. 

 

이 책에서는 산다는 것이 다 그렇다는 것 같다. 정수리가 뜨겁게 햇빛을 받으며 빛 때문에 하얗게 보이는 길을 눈을 찡그리며 걷는 것.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그러나 돌아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편편이 떠오르는 것.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둔 채로, 그래도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감자 껍질을 깎는 칼에도 앞면과 뒷면이 있어서, 내가 뒷면을 보도록 쥐고 채소의 껍질을 깎으면 껍질이 깎이지 않는다. 

 

중간 크기의 감자 2개, 큰 크기의 양파 1개, 보통 크기의 당근 반 개를 넣고 고형 카레 1개분을 1리터의 물에 개어 넣으면 거의 딱 맞게 2인분의 카레를 만들 수 있다.

 

준은 향신채를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2인분으로 다져 놓은 쑥갓을 모두 내 카레 위에 얹어 먹었다. 하리오의 유리 주전자에  경성우의 자스민 티백을 우려서, 금박을 입힌 유리컵에 얼음을 가득 넣고 뜨거운 자스민차를 부어 마셨다. 

요즘은 기성품으로 나온 과자나 아이스크림 등에는 손이 잘 안 간다. 대신 어느 카페의 케이크가 먹고 싶다든지 콕 집어 어느 빵집의 어느 빵이 먹고 싶다. 내일은 경복궁 합의 주악을 사고, 나폴레옹 제과점에서 벌꿀빵과 크로와상과 까눌레를 사야지, 이런 식으로. 

 

일본 사소설 풍으로 일기를 쓰는 일이 가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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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가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나는 일은 어린 시절의 의문과 닮았다.

우주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디를 우주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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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참고 넘기는 것을 심각할 정도로 못 하는 것 같다.

참고 넘긴다고 생각해도 다음 순간이 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울컥하고 올라와서 결국은 화를 내게 된다.

예를 들면 신행을 다녀온 뒤 시댁에 내려가는 일이 그렇다. 

원래는 하루만에 올라오려고 했는데 시할머니를 뵈어야 한다고 해서 저녁까지 먹고 하루 자고 올라오게 되었다.

나에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의 큰 스트레스라서, 남편이 아무리 곁에서 긍정적인 면을 보라고, 대구에 간 김에 여행을 하고 돌아오자고, 생각보다 힘들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가도 울컥울컥 스트레스가 올라오고, 그러면 그것을 남편에게 징징거려서 풀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협의책으로 거대한 보상을 제시했다.

큰 보상을 주면 이제부터 더 이상 징징대지 않고 기분 나쁜 티도 내지 않고 시댁에 다녀오겠다고.

비뮈에트나 민주킴, 아니면 제인마플의 원피스랑 재킷 정도면 괜찮은 합의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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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심리학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의 마음이 기억나지 않는다. 뇌과학에 대해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지레 포기했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학부 모교에는 심리학과가 없었고 심리학 입문이라는 교양 강의는 경쟁이 치열해서 들을 수 없었지만 인지과학의 이해라는 과목을 들을 수 있었다. 첫 시간에 뇌 그림을 그리고 뇌의 각 부위의 명칭을 배웠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숫자와 과학을 대하는 내 머리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배운 것들을 반도 소화하지 못했다. 당시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재미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내가 더 기대를 하고서 들었던 수업들, 인류학의 이해나 공연예술의 이해에서 얻지 못했던 어떤 것을 그 수업에서 배웠다는 것을 안다. 그게 무엇인지는 잊어버렸다.

 

심리학을 공부하겠다고 결심하면서 심리상담을 받아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 상담을 받는 대신 공부를 택하는 사례가 많으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심리상담을 시작했다. 소개를 받아서 찾아간 상담 선생님은 좋은 분이다. 처음 몇 번을 만나고 나서는 선생님이 하는 것 같은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의 욕망을 긍정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하려는 일이나 하고 싶어하는 일, 다른 사람에게는 판단이 두렵기 때문에 할 수 없는 말을 듣고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욕망의 대상을 걱정하거나 욕망으로 인해 촉발될 결과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는 대신 내 욕망의 좌절과 그로 인해 생기게 되는 나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먼저 생각하고 내가 그러리라는 것을 말하고 내 감정을 위로해주었다.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그 감정을 잘 제어할 수 있도록, 아무데나 던지지 않도록 막아주었다.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 아닌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데도, 나는 더 엉망이고 더 고집불통이고 나만 아는 사람이 되지 않고 대신 더 주체적이고 나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겪었던 훈육의 과정, 욕망을 억누르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해야 했지만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던 시간들, 납득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던 부분들, 타협하고 싶은데 타협이 되지 않아서 나를 몰아붙였던 시절들. 죽거나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고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점들. 어떻게도 할 수가 없어서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참을 수 없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로부터 어떤 사람을 천천히 꺼내 주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렇듯이 억눌리고 비틀린 사람들이 있으므로 그들의 억눌리고 비틀린 부분에 대해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여기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훈련받지 않은 사람에게 내 절망을, 고통을, 빠져나갈 수 없는 우물 같은 마음을 던지는 것이 잔인한 일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무언가를 던져넣을 우물이 필요하고, 그러니까 내가 다른 사람의 우물이 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최근에 읽고 있는 것은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최은영의 소설집 두 권이다. 오늘은 번역 과제를 하고, 최은영의 소설집에서 <모래로 지은 집>을 읽었다. 모래와 공무의 마음에 대해 말하는 나비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면서 마음에 관하여 생각했다.

나는 병원에서 우울과 불안을 통제하는 약을 받고, 심리상담을 다니면서 제대로 기능하는 법을 배운다. 나의 어떤 부분을 드러내고 감추는 법을, 관계 맺는 것을,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을 괜찮게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않는 법, 다른 사람이나 다른 상황에 내 마음을 투사하지 않는 법, 불안에 휩쓸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일을 멈추는 법, 불안해서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들을 시도하는 법을 배운다.

<모래로 지은 집> 속의 모래와 나비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다. 스물세 살의 모래와 나비에게 서른 살의 내 마음이 겹쳐 보이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최은영의 소설은 항상 마음 속 깊은 곳을 건드리고, 그러면 눈물이 날 것 같고 마음이 먹먹해진다. 글 속에서 나비는 공무와 모래의 마음을 어림하고, 자신의 어림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어림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림하는 것을 멈추고 같은 상황에 놓인 자신의 마음과 공무, 모래의 마음이 얼마나 다를지, 어디까지 같고 어디부터 다를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모래의 회복을 바라는 공무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를지 생각한다. 

 

최은영은 항상 마음을 포착한다. 마음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어떤 한 순간에 포착되는 것만이 가능하다.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면 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음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아무리 열심히 전달하려 애쓴다 해도 언어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내 안에만 비언어적인 포즈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은 감정보다는 차라리 햇빛이나 구름이나 빗방울에 더 가깝다. 마음은 느낄 수 있지만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편지로 전해지는 마음이란 편지의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간에 있다. 마음이란 시든 풀을 오래 만지작거리는 손길 속에, 피사체가 아주 작고 흐릿하게 나온 사진 속에, 고요한 풍경 속에, 선물 받은 스웨터의 부드러움과 따스함 속에, 감각 속에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마음은 소설로만, 시로만, 문학으로만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다. 마음을 말로 전달하려는 시도는 상담실 안에서조차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나는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미끄러운 표면을 그저 흘러내리다 나왔다는 감상만 가지고 상담실을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분명하게 나를 변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마음이라는 것을 절대로 내 선생님에게 전달하지 못할 것이고, 그것이 전달되지 않더라도 나는 나아질 것이고, 언젠가는 내가 선생님의 위치에 서 있을 것이다. 

 

내 감정과 욕구와 욕망에 대해 말하면서 내 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고 또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시리고 따듯한 햇빛처럼 그렇게 아름답다. 계속 미끄러지고 미끄러지면서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달하려는 시도를 멈출 수 없다는 것도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을 내포하고 있다. 

 

가슴이 시리다. 그러니까 이것은 원래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타인에게 오해 이외의 이해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당신의 관계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며 어떤 아름다운 순간들을 맞을 것이고 그 순간들에, 우리의 마음이 서로에게 전달되었는지와는 관계없이 우리는 우리가 더 가까워졌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그림 같은 순간, 기적 같은 한순간에는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어림하는 일이 퍼즐 조각처럼 딱 맞아떨어져,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는 어떤 한 순간이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쓸 것이다. 그 순간을 포착해서 내 글로 남겨야 하니까.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원래 네가 아니며, 약물도, 심리상담사조차도 아니며, 오래 전에 나보다 먼저 이 일을 겪은 사람들의 수기뿐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내가 가닿을 수 없는 마음뿐이다. 내가 겪지 않았던 일을 겪은 사람의 말을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느끼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 그것이 삶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거의 전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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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나의 취향, 나의 옷차림, 나의 말, 내가 쓰는 글, 내가 만드는 것, 내가 말하는 방식, 화제를 고르는 것, 그 모든 것을 누군가가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나와 가까운, 나와 친한, 나를 잘 아는, 나와 닮은, 혹은 내가 동경하는 사람이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들 가운데 무엇을 고르라고 말로, 혹은 말이 아닌 것으로 알려주고, 혹은 내가 고른 것이 옳았다고 말해주고, 내가 고른 것의 좋고 나쁨을, 나의 삶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음을, 내가 세상에서 지워지지 않아도 될 사람임을,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었으면 좋겠다. 

 

혼자서는 서 있을 수 없다고 느낀다.

한 발로만 서 있는 황새처럼, 어중간한 자세로 물 위에 서 있는 왜가리처럼.

이런 어색함을 지우려면 누군가가 내게 이런 삶이 괜찮다고, 내가 보는 세상이 맞다고, 내가 고른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 누군가는 나에게 편안한 사람, 나를 해치지 않는 사람, 나를 좋아하는 사람, 혹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어느 것이든 나와 위계가 있는 사람.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살았거나, 모든 것이 더 분명하고 덜 흐릿했던 시절을 지나왔거나, 나보다 분명한 직업이나 오래된 취향을 가지고 있거나,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라도 있는 사람들. 나에게 이야기를 수 시간 해주고 내가 그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 동시대의 내 친구들은 나에게 해줄 수 없는 것을, 나와 동등한 이는 나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위계를 휘둘러 나를 해치지 않을 사람들.

 

그들이 없을 때 내 삶은 흐릿하고 경계가 없고 그림자 같다.

어떤 것에도 확신을 갖지 못하므로 항상 허둥거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바로미터가 없이도 바로 서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어떻게 자신의 선택이 옳고 자신의 취향이 나쁘지 않음을 홀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제대로 기능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홀로 가늠하는 것 같다.

 

최근에 머리를 잘랐다. 결혼식을 기다리며 3년 정도를 내리 길러 온 머리를 턱선까지 잘라 이제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래쪽에 C컬펌을 해서 머리가 푸들 같다. 곱슬곱슬한 삼각김밥 같기도 하다. 며칠 동안은 길을 가는 모든 여자들의 머리만 쳐다보고 지냈다. 다들 머리가 길었다. 여름이 다가오는데도 머리를 짧게 자른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다. 20명을 보면 1명 정도 눈에 들어왔다(고불고불하게 펌을 한 아주머니나 할머니는 제외한다). 한때는 내 머리가 길을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보다 더 길었다. 거의 엉덩이까지 내려왔었으니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선택이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아주 분명하게 들었고 내가 못생겨서 슬프고 화가 났다. 

그래서 무작정 화장품들을 사들였다. 헤어 왁스를 사려고 했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눈썹 제모기와 쉐이딩과 피니시 파우더와 브러쉬 세트와 아이브로우 펜슬과 집게핀 모양의 헤어롤과 마스카라와 뷰러를 샀다. 내가 예쁘게 보이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었고, 내가 예쁘게 보이지 않는 것은 머리가 짧기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지나니 머리가 짧은 것에 익숙해진 것인지, 왁스를 바를 줄 알게 되어서 머리가 덜 뻗쳐 보이기 때문인지, 처음처럼 머리가 너무나 거슬리고 못생겨 보여서 울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폭이 넓은 아메리카 원주민 풍의 크림색 머리띠를 하나 사고, 머스타드색의 왕 리본핀도 하나 사서, 머리를 양쪽에서 땋아 리본핀으로 고정하거나 머리띠를 이용해 넘긴다. 오늘은 크림색 오건디 리본과 실핀을 이용해서, 실핀에 리본을 묶어 머리장식을 만들었다. 짧은 머리에 이리저리 꽂아 보니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씨엘>에 나오는 이비엔의 머리스타일을 응용한 것인데, 일반적인 장소에 그러고 가기는 어렵겠지만 내 마음에는 흡족하다. 

 

그리움은 단단하고 차가운 얼음설탕 같은 맛이다. 

할머니 옷장의 냄새가 나고, 혀가 아리도록 달고, 이빨로 깨물면 이가 시리고, 단단한 채로 식도로 꿀꺽 넘어가 명치 부근에 자리를 잡고는 뻐근하게 뻐기며 더 내려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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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백 패키지가 세이지 그린 색인 것이 오늘 고른 레녹스 잔과 잘 어울린다.

향은 전형적인 잉블로, 아쌈인 것 같다.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이번에도 첫 잔은 조금 연하게 우려졌다.
중국차를 주로 마시다 보니 30초만에 티백을 빼는 습관이 들어 있는데, 아무리 연수라고 해도 최소 1분 정도는 우려야 하는 것 같다.

어제 마셨던 애프터눈 티에 비해서
떫은 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더 달다.
하지만 차의 맛 자체는 강해서,
오후의 햇빛을 떠올리게 하던 애프터눈 티에 비해
확실히 아침을 깨워줄 만한 맛이다.

수색이 예쁘다.
잔은 레녹스.
자기가 두꺼워서 우아하면서도 단단한 맛이 있어 이 잔에 차를 마실 때면 여왕이 된 기분이 든다.
내 생활을 통제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해 주는 잔이다.

위타드 애프터눈티에 레이어드의 버터캐러멜 스콘.

조금 연하게 우려졌다.
깔끔한 실론 향에 떫지 않고 달지 않은 맛.

조금 더 진하게 우려보았다.

수색이 맑고 떫지 않아서 좋다.
그 외엔 특징이 없는 깔끔한 애프터눈 티.

잔은 민튼 태피스트리.
최근 가장 좋아하는 잔이다.
이름도 모를 때에 트위터에서 판매하시는 것을 보고
저기 오른쪽 거 제가 살게요, 먼저 해버리고 이름을 물었더랬다.
카드 일러스트가 좋다. 빅토리안 메이든의 로즈카드 점퍼스커트를 좋아하듯이.
이 잔은 꽃송이마다 유약을 도톰하게 발라 양감이 있고,
자기의 색이 맑은 흰빛이라 좋아한다.
가공 없이 잘 만든 은의 색깔이 밝은 흰빛인 것처럼,
도자기도 특유의 밝고 투명한 질감이 있는데
그 질감을 잘 살린 자기다.

얼음을 몇 개 넣어보았다.
차게 마셔도 떫지 않다.

레이어드의 스콘은 신기할 정도로 특색이 없는 맛.
영국식 베이킹이라는데 미국식인 것 같다.
위에 얹힌 버터는 가염버터였고
버터, 캐러멜 소스, 스콘 모두 특징이 없어서
맛이 있다거나 재료를 좋은 걸 썼다는 말조차 하기가 어렵다. 나쁜 맛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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