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책의 표지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예쁘다, 와 아름답다,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예쁘다: (형) 1. (기본의미) [(명)이] (대상의 색이나 모양이) 눈으로 보기에 좋고 사랑스럽다.
아름답다: (형) [(명)이] (어떤 대상이) 즐거움과 기쁨을 줄 만큼 예쁘고 곱다.
아름다운 것은 예쁘고 고운 것이고 예쁜 것은 좋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머릿속에 전자사전을 내장하고 있지도 않고 평소에 사전을 외고 다니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의 표지를 보며 느낀 감상이 예쁘다, 보다 아름답다, 였던 것은 아무래도 이 책의 표지가 차분하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무게감이 있으므로 러블리함보다는 고움 쪽에 좀 더 무게를 둔 단어 선택이었다.
이 책을 읽은 건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지만, 다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우연함이 나를 이 책에게로 끌고 갔다. 막 이사한 집 주변을 걸어다니다가 서점을 겸하는 카페를 보았다. 무엇을 찾겠다는 마음도 없이 서가를 두리번거렸다. 새로 나온 책들을 주로 들여놓는 북카페 같았고 문학 섹션이 다양하지 않았는데 거기에 이 책이 있었다. 오톨도톨한 질감이 살아 있도록 초록색 천으로 마감한 하드커버 장정에 황동색 박으로 크기가 다른 여러개의 동그라미들이 겹쳐져 있었다.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조약돌들 같았다. 책을 펴보니 「파묘」가 나왔다. 그 단편을 황정은의 다른 소설집(『아무도 아닌』)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책은 이순일이라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다. 노인의 삶과 노인의 가족과 노인의 가족의 삶이 나온다. 노인은 전쟁통에 삼팔선 근처의 마을에서 살아남았다. 식구가 많은 친척집의 식모로 갔다가 시장 상인과 결혼해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고 살았다. 아들은 뉴질랜드로 건너가서 졸업과 취직을 앞두고 있고, 이순일은 큰딸의 시가 재산으로 되어 있는 빌라에 살면서 큰딸의 집안일과 자신의 집안일을 돌보고 있고, 작은딸은 독립해 살면서 노인의 기준으로는 "너 하는 것도 살림이냐"는 삶을 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앞 문단에서 말한 그대로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앞 문단에서 말한 내용을 전부 알 수 없다.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기보다는, 삶을 살다가 한 번씩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조각들을 건져내서 이야기를 짓는 것 같다. 그냥 살다가, 살다가 한 번은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면 그 이야기를 하다가 너 누구 아냐, 이런 말도 하게 되고, 그러면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지는데, 그러다 보면 또 삼천포의 삼천포로 이야기가 흐른다. 그러다가 마지막은 결국 말줄임표로 끝난다.
한 번도 말줄임표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책에는 여러 번의 말줄임표가 있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기억은 뚝뚝 끊겨 있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은 분명한 분절로 나타난다. 기억이란 게 원래 그렇다는 듯이. 삶이란 게 원래 그렇다는 듯이. 기억이란 자, 엄마, 이제 차분히 앉아서 엄마 이야기를 해봐. 뭐라고 말하든 다 들어줄게. 라고 한다고 해서 태어나 겪은 첫 순간의 기억부터 지금 딸과 마주앉아 있는 이 식탁의 기억까지를 줄줄이 시간 순서대로 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은 분명히 한다. 그렇게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은 오히려 소설의 행간에 있다. 이야기가 말하지 않는 부분에서 독자는 많은 것을 유추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도드라지는 것은 분절된 기억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에 관련된 것이다. 도드라진 어떤 기억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가짜 기억들을 갖게 되는지. 삶의 어떤 순간이 우리에게 남고 어떤 순간은 지워지는지. 한영진과 한세진과 한만수의 엄마 이순일은 학교에서 제대로 글을 배워본 적이 없고,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놓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남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기억뿐이다. 그런데 그 믿을 수 없는 기억이 이야기가 된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아무렇게나 섞어놓아도 한 사람의 일대기가 된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섞어놓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삶인지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이런 이야기를 오랜만에 읽는다는 생각을 했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현재의 고단함을 토로하지 않는 것. 그저 주어진 대로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귀하다. 삶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신 여기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고, 있었다고, 지금도 어디엔가 섞여 살아가고 있다고, 계속 툭툭 끊기고 뒤섞이고 몇십 년 전이 지금 같고 지금이 몇 년 전인 것 같은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고. 삶이 어떤 건지 꼭 말해야 하냐고. 우리보다 한두 세대 위의 사람들만 하더라도 삶이 어떤 건지 말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가진 내러티브가 분명히 있다고.
표지 디자인이 이 책에 대해서 말해준다. 그 자리에서 책을 집어 후루룩 다 읽고는 책을 사서 나오면서 표지에 대해 생각했다. 고리처럼 이어져 있는 네 편의 이야기들에 대한 표지였다. 때로 서로의 내러티브에 깊숙이 스며들고, 때로는 점을 찍은 정도의 작은 접점밖에 남기지 않아도 분명히 서로 겹쳐 있는 이야기들. 표지 위에 그려진 원들은 책에 실린 이야기의 수보다 많다. 사슬처럼, 표지의 맨 오른쪽과 맨 왼쪽에는 반으로 잘린 조약돌들이 있다. 이 사슬은 끊어지지 않은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 표지의 바깥쪽, 표지의 뒤쪽까지도 쭉 이어질 것이다.
순자씨들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순자라는 이름을 가졌거나 순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우리의 어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태어나 자란 곳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떠나왔거나, 시장통에서 몇십 년 동안 시장통으로 출근하고 가게 위의 집에서 살고 잠드는 사람들이 모두 순자야, 순일아, 불리듯이. 모두의 집단적 기억과 개인의 특유한 기억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집의 내지에 황정은은 순자씨에게, 라고 적었다. 그 앞 페이지에는 작가의 서명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을 오래 바라보았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꾸 생각해보게 되었다. 늙어서도 무릎이 아프지 않고 두랄루민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반복되는 노동에, 오래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처럼 자꾸만 꼬이는 일상에 떠밀려 문득문득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모멸감이나 환멸이나 슬픔 때문에 마음이 눅눅하고 곰팡이가 슬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건강하다는 것은 몸을 말하는 것인가,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무튼 현재를 사는 일은 너무 고단하고, 그래서 나는 항상 나의 과거를 반추하고 나의 미래를 걱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그러니까 미래와 과거에 대해 걱정할 시간에 그냥 살라고 책은 말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일직선으로 정렬하고, 시간 순으로 늘어놓은 다음 그 이야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 시도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우리가 삶을 어떻게 끝이 닫힌 이야기로 만들고 우리가 "사는" 것을 방해하는지.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여기에서 지금을 살라고. 한 발짝을 바깥으로 떼어놓고,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어딘가로 가거나, 무슨 일을 하라고.
그 메시지가 큰 위로가 되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무엇이나 뜨거운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묘를 파내자 지열로 인해 구덩이 속에서 뜨거운 김이 오른다. 요리를 하면 뜨거운 기름이 튀고, 나물을 삶은 물을 버리느라 손가락 위로 뜨거운 물이 흐르고, 시장을 걷는데 햇빛이 뜨겁고, 손에 든 갓 튀겨낸 꽈배기가 뜨겁고, 이모를 만나러 간 날은 무척 더워서 눈을 한껏 찡그리고 상대를 확인해야 하고, 순대를 파는 아주머니는 퉁퉁 붓고 빨갛게 익은 손은 달걀을 쥐듯, 뜨거운 것을 억지로 만지듯 순대를 썬다. 그렇게 오랫동안 순대를 썰었는데도 그것이 뜨겁냐고, 자신을 기억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지 잘 알 수 없는 예전의 시장통 친구에게 순자씨는 묻고 싶지만, 그것을 묻는 대신 순대를 집어서 먹는다.
이 책에서는 산다는 것이 다 그렇다는 것 같다. 정수리가 뜨겁게 햇빛을 받으며 빛 때문에 하얗게 보이는 길을 눈을 찡그리며 걷는 것.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그러나 돌아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편편이 떠오르는 것.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둔 채로, 그래도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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