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일본 청춘 학원물에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은 현실의 고등학생들과는 몇백 광년쯤 떨어진 생물처럼 느껴진다. “에이, 이런 고등학생이 세상에 어디 있어?”라 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들은 에너지가 폭발하지도 않고, 욕을 남발하지도 않고,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세상에 적극적으로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림 처럼 정적이고, 성적인 에너지와도 멀어 보인다. 치열하고 초조하고 불안한 세계 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이 고등학생들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다. 아무리 급박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청춘들의 태도는 마치 스크린 너머로 바라보는 계절 같다. 여름에는 덥고 매미가 운다. 공기가 늘어지 고 햇빛이 쨍하다. 겨울에는 뺨에 닿는 공기가 차갑고, 달이 밝고, 거리가 호젓하 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계절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부드럽고 평안한 태도를 취한다.

 

 

     『책과 열쇠의 계절』은 그렇게 넘겨 다보는 계절처럼 흘러가는 이야기다. 마쓰쿠라와 호리카와는 냉철한 판단력으로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 타인을 평하고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면, 미스터리한 세계에 떨어져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고 있다. 좋 아하는 선배의 반짝이는 입술을 바라보고, 자판기에서 팩 녹차를 뽑고, 도서실의 책을 정리하는 사이사이, 두 사람은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다가, 마침내 는 커다란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두 사람의 서사를 이끄는 손은 도망칠 수 없는 거대한 사건 앞으로 두 주인공을 이끌어 놓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결단도 행동도 남겨진 주인공들의 몫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것의 끝이면 서 시작이다. 계절은 평탄히 흐르고, 퍼즐을 맞추듯 사건은 순탄하게 풀린다. 그 안에서 끝까지 긴장을 유발하고 유지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다. 이 소설은 서 로 앞을 바라보며 도서실의 카운터 안에 앉아 있던 두 고등학생의 일상의 궤도가 천천히 맞닿아 얽히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우연한 계기로 함께 행동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바깥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다가, 마침내는 서로 팔을 곁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호리카와는 “도서실 닫을 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와라”고 속엣말을 한다. 그 말은 이제까지처럼 담담해 보이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계성을 내포한다. 이제 호리카와는 마쓰쿠라를 기다리고 있다. 마쓰쿠라가 “학 교에서 꺼낼 수 있는 이야기”의 작고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오기를, 마쓰쿠라의 궤도가 호리카와 자신과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는 대신 다시 함께 있게 되기를, 담담한 간절함과 부드러운 초조함을 담아 바란다. 『책과 열쇠의 계절』은 초여 름부터 초겨울까지, 두 계절을 함께 보내며 평온해 보이지만 미스터리로 가득한 세계를 천천히 유영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책과 열쇠의 계절』은 여섯 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된 청춘 일상 미스터리 다. 첫 단편 「913」에서 두 사람은 느긋한 초여름 낮에서 어둡고 비정한 음모의 세계로 느닷없이 굴러떨어진다. 마쓰쿠라는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명탐정 다운 한 방을 먹여, 미인 선배의 무해하고 달콤한 웃음 속에 숨어 있는 음모를 잡아낸다.「록 온 로커」와「금요일에 그는 무엇을 했나?」를 거쳐, 마쓰쿠라는 날카로운 관찰력을, 호리카와는 마쓰쿠라가 놓친 관점을 짚어내는 명민함을 보이 며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콤비로 거듭난다. 그러나 여전 히 호리카와는 번쩍이는 미용실에 함께 가서 머리를 자르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함께 행동하여 재미있는 사건들을 구경하거나 풀어내지만, 친밀하게 일상을 공유 하는 것은 어려워하는 둘의 관계는, 「없는 책」과「옛날이야기를 해줘」를 거치 며 개인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호리카와는 마쓰쿠라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동 지침을 수정하고, 마쓰쿠라는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호리카와에게 털어놓는 다. 그래서 연작의 마지막, 「친구여, 알려 하지 마오」에 이르면, 호리카와는 자 신의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둘의 이야기는 시작된 줄도 모르게 시작되어, 있는 줄도 몰랐던 자리를 만들며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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