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다 레퍼토리 마지막 시즌 한국 막공으로 아이다를 자첫한… 미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전세계 라스트 막공으로 자첫을 하고 거하게 치인…


이 사람은 머리를 풀고 귀곡성을 지르며 하루종일 A Step to Far와 Written in the Stars를 반복재생하며 존재하지 않는 Enchantment Passing Through 음원을 찾아 유튜브를 헤매고 다니는 귀신이 되었습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데 레퍼토리 총막으로 취향극을 자첫한 귀신은 때깔이 고울까요… 하 맛만 보고 죽어서 아귀 될 거 같은데ㅜㅜㅜㅜ

때는 7월이었습니다. 갑자기 트친님이 아이다를 영업하기 시작합니다. 탐라에 들어갈 때마다 아이다가 있습니다.

사실 그때 알았어야 했어요. 이 극은 내 멱살을 잡을 것이다… 이 극은 내 취향일 것이다… 왜냐하면 저는 아이다를 부르짖는 사랑하는 트친님이 쓰시는 글을 사랑하거든요… 네 그때 알았어야 했죠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분께서 좋아하시는 작품이 내 취향이 아닐 리가 없다…

그러나 7월에는 본진이 연극을 시작했어요… 그리고 대극장은 비싸요… 감히 누추한 제가 귀한 블퀘에 가도 되는 건지… 그렇게 고민하다 막공주가 왔고 본진이 하는 극을 보다가 막공날이 왔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도 망설이고 있었어요. 아이다면 시카고급이니까… 곧 돌아오겠지. 돈 있을 때 보면 되지.

그러나 그렇게 안일한 마음으로 표를 잡지 않았던 저는!!! …아이다의 이번 시즌이 이번 레퍼토리 마지막이라는 중대 소식을 벼락처럼 처맞게 됩니다. 아니 그렇다면… 정말 다시는 오지 않을 극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이렇게 앉아서 놓쳐서는 안 된다!!!!

저는 표가 없지만 일단 비루한 몸뚱이를 주섬주섬 주워 블퀘로 출발합니다. 다행히 블퀘에서 트위터를 무한 새고하며 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3층 1열 정중앙을 얻습니다. 네, 총막공이에요. 세미막은 양수에 실패했거든요. 레!퍼!토!리! 총막공입니다… 녜… 시발… 이렇게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저의 아이다 자첫이자 강제 막공… 이 시작됩니다.

캐스트는 김수하 최재림 민경아 박성환.

메렙이 원캐인 게… 정말 대단한 부분… 미친 거 아닌지… 어케 메렙을 원캐로 하셨대ㅜㅜ

블퀘 3층 1열 시야 생각보다 좋아요. 생각보다 배우들이 덜 면봉이고요. 물론 여기서 우리는 이 후기를 쓰는 사람의 마지막 대극장 3층 관람은 국립극장 해오름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해오름 3층에 비하면 어떤 극장이든 선녀가 아니겠어요… 암튼 배우들도 잘 보이고 바닥 조명도 잘 보여서 좋았습니다. 자리에 앉자 디즈니 블루 배경에 커다랗게 눈이 박혀 있습니다. 디즈니 덕후는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디즈니 블루와 디즈니 성을 보면서 가슴 두근거렸던 사람의 자동반사입니다. 하 이 시점에서 이미 저는 사랑에 빠질 준비가 끝났다고요… 입덕부정이 시작됩니다.

오버츄어가 들립니다. 네 그렇죠. 대극장 뮤지컬에는 오버츄어라는 게 있어요. 중소극장 연극을 보던 사람은 그만 아연해집니다. 하? 이렇게 사람을 끌어들여? 이렇게 단번에? 준비할 시간도 안 주고 일단 냅다 멱살 잡고 극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야? 음악이 온몸을 채우고 제 심장으로 흘러들어오더니 그대로 저를 무대에 메다꽂습니다. 아니 분명 낮공 노래를 문 너머에서 귀동냥으로 들을 때는 절대 이런 노래가 아니었는데…? 여러분 아이다 노래 맛집이에요. 디즈니인데 당연하겠지만! 하지만 나도 몰랐지! 저 공연 보기 전에 일라보렛을 들었거든요 근데 별로 재미없어서 듣다가 껐어요… 하 산호님 왜 그랬니 진짜…

암튼 오버추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저는 흩어진 정신을 주섬주섬 주워 스토리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트친님이 그랬어요. 이집트 버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라고. 롬앤쥴이라고 생각하라고. 예스. 대충 파악은 끝났습니다. 저는 이미 끝내주는 롬앤쥴을 봤죠. NT Live 롬앤쥴이요… 그리고 저는 원래 롬앤쥴을 좋아합니다… 네 그 처절한 애들의 사랑이 너무 좋아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그 에너지 넘치는 사랑이 너무 좋아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던질 수 있는 십대만의 특권,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만을 위해 모든 걸 버릴 수 있는 행동력, 그 무모함… 십대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소년소녀만이 가질 수 있는, 생의 모든 에너지를 현재에 가져다 쓰고 아무 것도 아끼지 않는. 하 그 때의 벅찬 사랑의 감정이 되돌아오면서 아이다가 더 기대되기 시작합니다. 트친님은 분명히 스토리가 어느 정도 유치하니 감안하고 보라고 하신 말씀일 텐데… 암튼 무대가 열립니다. 박물관이에요. 뭔가 거대한 연록빛 상자가 있고요. 거대한 모자와 화려한 망토를 걸친 군주도 있고요. 나무로 만든 활을 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리고 흰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남자와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유물을 관람하고 있습니다. 그때 유리관 속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군주가 걸어나옵니다. 시간이 멈추고, 암네리스가 노래를 시작해요. Every Story is a Love Story.

이 세상의 모든 얘기
소설이나 전설이나
운명적인 실화거나 동화 속 이야기나
수천 년을 전해오던 오래된 이야기나
방금 전에 일어났던 새로운 이야기나
아름답고 기쁜 얘기
잔인하고 슬픈 얘기
수천 명이 나오거나
한 명만 나오는 얘기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세상 모든 얘기
인간의 운명과 같은 애절한 사랑 얘기

하. 모든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래요.
그렇죠.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 누구를 사랑해서, 혹은 누군가 누구를 사랑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니까요. 여기서 저는 패배를 선언합니다.

하 끝났어… 사랑 얘기 한다잖아요… 모든 이야기는 사랑 얘기라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꽉 닫힌 사랑 이야기 하겠다는 거 아냐… 돌아가는 사랑 이야기… 시공을 초월한 사랑 이야기… 좀 전에 박물관에서 남녀한테 스포트 라이트 비춰 줬잖아요. 그니까 걔네가 지금 환생했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다시 만나서 사랑한다는 거겠지? 쟤네는 운명이라는 거겠지? 시공을 초월한 운명… 시공을 초월한 사랑… 그 어떤 조건에서도 결국 서로를 찾아내고 마는 사랑… 하 너무 좋아요… 사랑해요… 이 사람의 웹소 취향은 서로를 구원하기 위해 몇십 번의 생을 돌고 도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최근에 감명 깊게 본 드라마는 상견니고요… 당연히… 도입부부터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

그렇게 암네리스가 배경지식을 설명해주는가 싶더니 갑자기 활을 든 전사들이 뛰어듭니다. 호루스의 눈이 그려진 배가 나타나더니, 붉은 옷을 입고 복근을 드러낸 남자가 뛰쳐나와 신나게 노래를 부릅니다.
거칠 것 없는 남자 주인공, 라다메스의 등장입니다. Fortune Favors the Brave.

운은 용기 있는 자의 것.
네. 롬앤쥴의 세상의 왕들과 조응되는 노래죠. 영광은 우리의 것. 신납니다. 마구 내달리죠. 손에 넣고 싶은 것을 단 한 번도 거절당해본 적이 없는, 부모도 능력도 노력도 다 갖춘 남자만이 부를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찬가. 세상이 가장 좋은 것만을 내어주었기 때문에 한껏 오만하고, 자신의 능력이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보다 뛰어나니 자기효능감이 넘치고, 돈이든 모험이든 미래든 차고 넘치도록 가지고 있으니 나눠주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죠.

난 모든 일 다 이뤘고 내 앞길엔 거칠 것 없네
광활한 나의 꿈이 땅끝까지 펼쳐지리
저 태양도 저 파도도 저 하늘의 별들까지
다 우리가 지배하네
영광 우리의 것.

라다메스는 신났어요. 한 번도 패배해본 적 없는 눈부신 젊은 장군님.

영광과 젊음과 행운을 모두 움켜쥔, 신의 사랑을 받으며 삶의 가장 좋은 것만을 누리는, 치기어린 청년. 여기서 저는 직감합니다. 쟤는… 어리다. 14살? 아무리 많게 봐도 16살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음… 네 완벽한 로미오의 조건이네요… 자 줄리엣만 만나면 돼 이제…

트친님이 말씀하셨어요.
최라다는 쾌남!!!! 쾌남이다!!!!!! 그리고 저는 최라다 이후 유튭에서 어떤 라다를 찾아보아도 밋밋하게 느껴지는 저주에 걸립니다. 아니 다른 애들은 왜 다… 저런 패기가 없어…?
다정하고 멋지고 어른스럽고 당당한 장군들이 넘쳐나지만, 최라다만큼 치기와 오만으로 가득한 쾌남은 없어요… 역시 미성년의 사랑은 치기!오만!파멸이다!
하… 초딩미 가득한 라다… 내가 사랑한다… 우연이란 없어 운명도 없는 거야
내가 살아가는 길 내 자신이 만드는 거야

하… 네 전 이게 세상의 왕들이랑 같은 노래인 줄 알았어요. 라다메스가 아이다를 만나기 전까지요… 자 원하는 걸 모두 이룬 청년이 있습니다. 태양도 파도도 별들도 다 자기가 지배한다고 믿어요. 우연은 없고 운명도 없고 나는 능력이 좋으니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 다시 말할게요 저는 오만한 애새끼(가 사랑 앞에서 철저히 무력해지는 것)가 너무 좋아요ㅠㅠㅠㅠㅜㅠㅠㅠ 너의 오만? 그것은 이제 곧 깨어질 것이다. 너의 마지막 영광의 순간을 즐기도록 해라.

극은 말하죠.

너의 운명은 저 별에 쓰여 있으니 네가 바꾸지 못할 것이다.
너는 별의 지배를 받는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으니 네가 살아가는 길은 별이 예비한 것이고 너의 미래는 저 하늘의 별이 되는 것이다. 너의 자유는 더 이상 없겠지만 너는 너 스스로 네가 살아가는 길을 없애고 네 자유를 포기할지니.

별. 우연. 운명. 모두 저 노래에서 말해버렸죠.
심지어 “모든 일 다 이뤘고 앞길엔 거칠 것 없네”라는 과거형 문장까지.
이미 모든 일을 다 이뤘어요. 이제 더 할 일이 없어요. 하지만 라다메스를 위해 예비된 별의 길은 이제 막 시작합니다.

극을 처음 보고 있으니 저런 디테일까지 잡아내진 못했죠. 그냥 신나게 내달리는 넘버가 나오니 같이 신납니다. 세상의 왕들을 생각하며 내적 어깨춤을 추고 있는데.

The Past is Another Land.

습관처럼 영광을 좇는 라다메스 장군께서 자존심만 남은 누비아의 공주님을 노예로 잡아왔습니다. 자존심 세고, 고집 세고, 용기 있고, 어느 정도의 무력에 항해력까지 갖춘 공주님.

사담인데, 여기서 조금 슬펐어요. 강대국 이집트의 유일한 후계자인 암네리스는 라다메스의 약혼녀로서 아름답게 치장하고 약혼자를 기쁘게 하는 것만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약소국 누비아의 후계자인 아이다는 항해술에 방어술까지 갖추고 있어요. 왕이 직접 공주에게 항해술을 가르쳤다고 하고요. 결국 나라가 커지고 강대해질수록 남성중심주의와 가부장주의가 여성들을 더 옭아매게 되는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아무튼, 누비아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을 따라온 누비아인들을 모두 잡히게 했다고 자책하는 아이다 공주님. 공주님께선 병사 하나를 인질로 잡고 칼을 휘두르며 협상을 시도하십니다. 협상은 실패로 끝나지만, 라다메스에게는 그 순간이 모든 게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일명 “나한테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후후. 클리셰고… 근데 최라다가 너무 애기여가지고요… 90년대 순정만화 재질입니다. 진짜 딱 그거임 나한테 반항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후 짜릿. 자 너는 이제 네 인생을 말아먹을 것이다. 일주일 안에. 암튼 이 쾌남 애기 왕자님은 아이다에게 확 끌립니다. 그래서 아이다를 차마 힘든 노동환경으로 내몰 수가 없었어요. 그리하여 암네리스 공주에게 아이다를 시녀로 보내는데… 최라다 애기미가 뿜뿜… 솔직히 누가 봐도 너 지금 쟤한테 끌렸다. 너 지금 쟤한테 마음 있다. 누가 봐도 너 지금 사랑에 눈이 멀어 있다… 아직 사랑을 시작도 하기 전인데도. 갑자기 분위기 반전.
조세르가 등장합니다. 라다 아빠.
근데 조세르랑 조세르 앙상블들이 입은 옷은 아무리 봐도 이집트 옷이 아닌 것 같은… 무슨 사제복 같은데… 뭐 예쁘니까 됐고요. Another Pyramid. 그 음… 여기 좀 힘들었어요. 바닥 조명이… 벽돌을 형상화한 건가? 그물을 형상화한 건가? 되게 눈 아프고… 환공포증 있는 사람 기겁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런가 목 뒤 털이 곤두선 상태로 관람합니다.

조세르 나올 때마다 바닥 조명 너무 힘들어요ㅜㅜ 얘 빌런이라서 일부러 관객 힘들게 만드는 조명 까는 건지… 조명 좀 징그러워요. 암튼 이 극의 빌런이 등장합니다. 별 거 없는 빌런. 그치만 넘버는 좋습니다. 귀에 쫙쫙 달라붙어요. 라다메스는 깨닫습니다.

암네리스 공주와의 9년 약혼이 결혼으로 이어질 때가 왔다. 나는 새로운 파라오가 될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과연 그걸 원하는가? 난 당장 내일이라도 배를 타고 영광을 좇으러 떠나고 싶은데?

How I Know You

이 와중에 라다메스의 심복 노예인 누비아인 메렙이 아이다 공주를 발견합니다. 메렙은 아이다를 알아봅니다. 아이다가 신분을 밝혀 누비아인 노예들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 청합니다. 아이다의 내적 갈등이 시작됩니다.

공주님은 누비아인 노예들의 희망이에요 vs 아니 이제 나도 노예일 뿐이야.

줄리엣의 유모가 여기서는 라다메스의 심복 메렙으로 나타납니다. 죽을 뻔한 저를 라다메스 장군님께서 구해 주셨어요! 자, 사랑에 빠질 조건이 완성되었습니다. 날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vs 라다메스 장군도 알고 보면 따뜻하고 인정 있는 사람이네. 와 클리셰다. 그치만 좋아요! 연극도 아니고 뮤지컬은 클리셰 보는 맛이지!

My Strongest Suit

아이다가 고생을 안 하기를 바란 라다메스는 아이다를 약혼녀 암네리스의 시녀로 보냅니다. 선물이에요.
메렙이 아이다를 소개하자 암네리스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짜증을 냅니다.

“또 시녀냐?”

네 우리의 라다메스 장군님은 상당히 무딘 분입니다. 암네리스가 시녀를 좋아해? 그럼 또 줘야지. 사실 둘이 얼마나 소통이 안 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죠. 서로에게 필요한 게 뭔지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이후 무도회 씬에서 암네리스는 “다음번 정복 전쟁에는 나도 따라가겠다”고 하고, 라다메스는 “야영을 해야 하고, 벌레가 있다”고 합니다. 암네리스는 새침하게 “안 갈래요”라고 대답하죠. 이 씬은 개그씬이지만 너무 슬픈 장면이에요.

둘은 이미 같은 곳을 보지 못해요. 라다메스가 아이다한테 끌린 게 이해가 되죠… 같이 모험을 떠나 줄 사람이니까. 물론 사랑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사랑을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사랑이 당신을 잡아먹을 것이다. 아이다 1장 1절.

Enchantment Passing Through

나왔다!!!!!!!!!!! 팜투팜!!!!!!!!!!!!!!!!!
하 발코니씬 다음으로 유명한 발코니씬보다 야한 그 팜투팜!!!!!!!!!! 후 이거 제 최애곡이에요. 근데 박제가 없어요… 단 하나도 없어요…ㅠㅠㅠㅠㅠㅠㅠ 신시야
신시 듣고있니? 인챈
인챈 줘 신시야 농담 아니야 인챈을 오만원에 팔아도 살게 인챈줘… 하 신시 하드 해킹하고 싶다.

이 노래가 진짜 대단하거든요… 노래 제목이 “스쳐 지나가는 매혹”이잖아요. 사실 모든 사랑의 두근거림이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한 번의 손짓, 한 번의 눈길을 교환하는 순간이에요. 상대에게 확 끌린 순간. 끌림의 이유도 모르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툭 던진 한마디, 잠깐 본 한순간의 눈빛으로 활활 불이 붙어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쟤한테 왜?
쟤는 금방 잊혀질 사람이야. 내 인생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그래도…
그래도 왜?!

라고 말하는 게 인챈입니다. 박력이… 대단해요. 아이다랑 라다메스가 무대 정중앙에서 만난 뒤 서로 반대편으로, 무대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멀어지면서 듀엣을 하거든요. 라다메스가 무대의 하수 앞쪽으로 나오면서 박력 있게… 롹스피릿을 담아 고음을 시원하게 지릅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방금 만났는데
뒤돌면 금방 잊혀지게 될 여!!!!자!!!! 에게!!!!!! 쾅 하고 발을 구르면서 입고 있는 붉은 치맛자락을 휙 날립니다. 박력이라는 것이… 폭발한다…!!!! 하 이렇게 저는 입덕을 합니다… 이게 박제가 없다니 신시야 진짜 너무한다. 암튼 저는… 아주…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합니다. 사랑은 원래 입덕부정기가 가장 맛있는 거라고요… 아이다랑 라다메스가 지금 둘 다 입덕부정기예요. 비포선셋 찍고 있으면서 아닌척함ㅋㅋㅋ “뒤돌면 금방 잊혀지게 될 여자”는 영어로 보면 가사가 두 가지입니다. A woman whom I hardly know at all and should forget

A woman whom I hardly know at all and will forget

조동사 차이 보이시지요 엉엉엉엉

잊어야 할 여자➡️잊을 여자

그러나 둘 다 처절히 실패합니다… Should에서 will로 가는 과정에는 다양한 판단과 생각들이 있을 겁니다. 라다도 아는 거죠. 이 여자는 위험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갈 수도 있다. 그러니 뒤도는 순간 잊어야 할 대상에서, 반드시 잊을 대상으로 바뀌는 거죠. 그러나 사랑에서 부정의 말은 뭐다? 반대의 마음을 수반한다. 라다메스는 중얼거립니다. 완전히 홀렸어
내가 얘기한 그 모든 것
그녀는 다 알아 자유를 말하는 여자. 이제 공주와 결혼해서 파라오가 되어 다시는 이집트 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서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남자에게 네 인생의 주인은 너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라고 말하는 여자. 감히 궁정 노예 앞에서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짜증 낼 줄도 아는 여자.

자유의 달콤함을, 용맹함의 가치를 아는 여자.

사실 왕 자리 따윈 요만큼도 관심이 없고 뛰어다니며 정복 전쟁을 할 마음만 만만했던 라다메스는 그 말을 듣고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기에게도 선택권이 있다는 걸 깨닫는 거죠. 문제는 그 선택권으로 하는 일이 고립과 파멸임ㅋ
그것도 교만과 아집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타인을 사랑해서 발생하는 파멸입니다.
눈을 가리고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랑… 하 이걸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어요…

선택이요? 라다메스는 아이다를 선택합니다. 사랑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됩니다. 사랑에 구속된 라다메스는 정말로 자유롭게, 모든 걸 버리기를 선택하게 됩니다. 재산, 지위, 명예, 가족까지. “네가 나의 전분데”(Written in the Stars)

라다메스의 사랑은 가히 신화적입니다. 별들은 계속해서 요구합니다. 네가 네 사랑을 위해서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는지 보자.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내놓으렴. 그렇다고 해도 네 사랑만은 남을 테니. 네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무엇까지 내놓을 수 있는지 보자. 그래서 라다메스는 정말로 다 버리고 고립되길 자처합니다. 너무 좋죠…

- 네 인생에는 무한한 자유가 있고 넌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 알았어. 무한한 자유로 지금부터 널 사랑하기를 선택해서 너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다 버릴게.

이렇게 자유는 구속이 되고, 눈앞에 펼쳐질 예정이었던 장밋빛 모험과 피의 정복은 감옥으로 수렴되고, 삶은 죽음으로 내달립니다. 기다리고 있는 건 밤의 어둠처럼 검은 파멸뿐.

그럼에도,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요.

16세의 쾌남이란 그런 것입니다. My Strongest Suit(reprise)

암네리스의 공허함과 허무함을 이해하는 아이다. “또 다른 나”를 찾게 될 거라고, 모두가 기대하는 모습대로 살기 위해 자신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암네리스에게 말하는 아이다.

아이다가 하는 말은 늘 한결같아요. 라다메스에게도 암네리스에게도. 너의 본모습을 찾아가라고. 너는 할 수 있다고. 주변에서 기대하는 거 말고, 네가 원하는 걸 하라고. 그래서 라다메스도 암네리스도, 아이다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죠. 신뢰하고 기대요. 자신을 이해해준 첫 번째 사람이니까.

아이다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자고.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아이다에게는 정해진 길이 없어요. 아이다는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었고 이제 누비아의 공주로 돌아가기는 요원해 보이니까요.

정체성도 혼란스럽고, 누비아인 노예들의 기대를 등에 업고 있으면서, 홀로 남겨진 아버지도 걱정해야 하고, 자기 마음은 부평초처럼 흔들려요. A Step too Far에서 라다메스는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사실 진짜 혼란스러운 건 아이다일 거예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하는 누비아의 공주님은, 누구보다도 산산이 찢긴 마음을 안고 정처 없이 헤매게 됩니다. 아이다는 누비아 백성들에게 힘이 되는 공주님도, 모든 걸 다 버리고 라다메스와 국경에 집을 짓는 필부필녀도 될 수 없으니까.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조언이, 정작 자신은 희망의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이 어둠 속에 내던져진 소녀에게서 나온다는 거 너무 슬프고 짜릿하죠.

Dance of the Robe

그래서 그 소녀는 이제 왕관을 받아들게 됩니다.

네헤브카가 누더기 예복을 가져와서 입혀줍니다.

사실 라다가 아이다한테 빠진 건 너무 잘 이해가 되는데 아이다가 라다한테 빠진 건 어느 시점인지 궁금했거든요. 근데 제 생각엔 여기예요. 놀랍게도…

인챈에서 알 수 있듯이(“방금 만난 그에게”) 아이다도 라다메스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이 있었어요. 그러나 아이다는 라다처럼 모든 것을 던져버리기엔 적국의 공주로서 자존심도 세고, 백성들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죠.

그래서 My Strongest Suit에서 라다메스가 아이다를 만나기 위한 구실로 암네리스를 찾아와도 아이다는 구실을 대어 매몰차게 거절해요.

그러나 메렙의 주도로 누비아인 노예들을 만난 순간,
자기에게 거는 그 무거운 기대들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저는 여기서,
아이다가 사랑에 빠지기로 결심했다고 생각합니다. 누비아의 백성들을 위해 예복을 입고 투사가 되어달라니.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마치 야생의 새 같은 아이다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큰 짐이었던 거죠.


라다메스의 사랑이 자유를 향한 갈망에서 시작되었다면 아이다의 사랑은 책임에 대한 도피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앞서 말했듯 사랑이 한 번 시작되면, 그 호랑이가 한 번 내달리기 시작하면, 처음 시작이 어땠든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세계가 사랑으로 수렴하고 사랑은 세계를 저버립니다.

Not Me

하 저 이 노래 너무 좋아요
사랑에 대한 찬가이면서 마음에 대한 고백이면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복기예요. 아이다와 암네리스가 노래합니다.

난 사랑이 이렇게 좋은 줄
나는 몰랐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나는 몰랐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어서
그 모든 세상 내던질 줄은
나는 몰랐어 하……
볼 때는 좋았지……
2막 가면 이 노래 생각하며 눈물 줄줄 흘리게 될 텐데…

네 이 노래를 듣고 저는 확신했어요 아이다는 Dance of the Robe에서 사랑에 빠지기로, 혹은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 맞다…
그러니 이제 저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려 했던 사랑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니,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니. 나는 몰랐어.
아름답죠. 벅차고요. 그리고 슬퍼요…ㅠㅠㅠㅠ 한편 해맑은 우리의 장군님이 외칩니다.

“별 거 아냐! 내 전재산이야!^^”

전재산을 털어 누비아인 노예들을 구휼하고, 마치 “마트 세 군데 돌아서 허니버터칩 사왔어!^^”처럼 말하는 해맑은 패기… 하 애기야…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메렙ㅠㅠㅠㅠ 메렙아ㅜㅜㅜㅜ Not Me 내내 절규하는 메렙…
메렙이 계획했던 것들이 모두 틀어질 때,
자신의 주인의 결혼도, 자신의 공주님의 결정도,
그 불확실하고 연약한 마음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모두 뒤틀리고 엉망이 됩니다. 메렙은 약은 사람이에요. 상황을 보면서 움직일 줄 알고, 눈치를 볼 줄 알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적절한 수단을 일으킬 줄 알죠. 모두 생존 스킬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이집트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게 메렙이 한평생 쌓아 온 것이 그놈의 마음!!!! 하나 때문에 개판이 납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어요. 설득도 불가능하고, 되돌리는 것도 불가하죠.
마음이니까.

라다메스의 마음에 의지해 자신의 생존을 도모했던 메렙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알겠죠.

Elaborate Lives 나왔다!!!!!!!!!!! 발코니씬!!!!!!!!!!!!!!!!!!! 뮤지컬 역사상 가장 섹시한 고백!!!!!!!!
와 저 3층인데도 숨 참고 봤어요….. 최라다 몸 좋더라…
이 시대의 참 남주란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두 무릎을 다 꿇고… 사랑을 갈구해요….
그렇다 사랑을 청하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성 상 드립니다.

여기 한국 연출이 대단해요. 무대 양 끝에서 시작해서, 아이다가 망설이는 사이 라다메스가 천천히 다가오면서, 무릎을 꿇고 사랑을 청하며 애무를 합니다… 와 진짜 난 이 장면 전까지 내 심장이 안 뛰고 있었는 줄 알았어… 무대 장악력이 와…

우리의 복잡한 인생들
야망들로 가득해
그 속에서 우리들의 사랑
어떻게 살아있을까

해석: 널 위해 내 야망을 다 버릴게 우리가 겪는 이 모든 것
그런 삶은 난 싫어
우리가 겪는 이 모든 것
그런 사랑 난 싫어
너와 있고 싶을 뿐
평화롭게 영원히

해석: 난 이제 모험도 전쟁도 바라지 않아 놀랍게도 난 평화를 원해 너와 단 둘이 영원히 평화롭기를 누구도 우리 둘만의 세계를 파훼하지 않기를 지금 나의 이 고백
부담되겠지만
완벽한 때가 오길
기다릴 수 없어

해석: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어 하지만 내가 널 사랑해 부담되겠지만~ 하면서 무릎 꿇은 자세에서 천천히 일어서면서 아이다 아이다의 양손을 자기 양손으로 하나씩 잡는데 정말… 기절… 서윗… 열정… 불타는… 정열… 하 내 눈으로 무대에서 한 번이라도 이걸 봐서 너무 다행이다ㅜㅜㅜㅜㅜㅜ
그리고 열정적인 첫날밤이… 시작됩니다 너무나 아름다워요… 저는 그만 여기서 정신을 잃고

The Gods Love Nubia 그러나 공주님에게는 아직 시련이 부족합니다.
조국과 사랑 중에 뭘 고를래?
너의 아름다운 조국이 너를 부르는데?

후 기력 딸린다
2막은 좀 이따… 쓰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이틀 걸렸음


별점 ★★★★☆


     취향인 영화에는 점수를 후하게 주는 편이라, 이 영화에도 3점 반을 줄지 4점을 줄지 망설였다. 고민을 끝낸 건 내가 아니라 별 반 개짜리 기호를 허용하지 않는 내 키보드였다.


     영화는 한 소녀의 성장기다. 중학생 바바라는 몇 가지의 주문과 직접 만든 무기들을 가지고 거인들을 죽인다. 거인들은 사람의 신장을 순록 고기에 곁들여 먹는 무시무시하고 커다란 잡식성 개체들이다. 바바라는 온갖 잡동사니들을 주워모아 결계를 치고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거인들과 숲으로부터 보호한다. 디앤디 미니어쳐를 갖고 놀고 주사위를 굴리며 하루 종일 혼잣말을 하는 바바라는 주변 모두에게 별난 오타쿠 소리를 듣는 왕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거인들을 죽이는 것은 고독하고 힘든 작업이지만, 바바라는 해야만 한다. 바바라에게는 지킬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소녀의 성장담에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앤의 다이애나처럼, 제인의 헬렌 번즈처럼, 루이제 린저의 코르넬리아처럼. 친구는 때로 무서워서 도망치더라도 마지막에는 다가와 손을 잡아주는 존재다. 소녀가 성장하기 위해 영웅이 되어야 한다면, 소녀의 영웅은 소녀의 친구가 되어야만 한다. 옆에 있는 것은 영웅적인 행위다. 고립과 폭력을 함께 감내하면서 손을 잡아줄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 모든 영웅 서사는 조력자가 있어야만 완성된다. 이 영화에서 최고의 영웅은 소피아다. 도망치더라도 반드시 돌아오는 친구는 정말로 소중하다.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는 것은 그 자신의 성장을 위한 일이지만, 주인공의 옆에 있어주는 것은 온전히 타인을 위한 일이다.


      바바라는 살기 위해 세계를 만들었지만, 그 세계 속에 기꺼이 휘말려 들어와 준 소피아가 없었다면 바바라의 이야기는 얼마나 협소하고 폐쇄적이었을까. 영화는 관계와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보호하려고 했던 친구가 자신을 보호해 준다는 역설적이고도 아름다운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소피아가 언제나 노란색 바람막이를 입고 다니는 것은 케케묵은 상징이다. 영화는 색채 대비를 잘 사용한다. 빛과 어둠, 불빛과 그림자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사실 결말만 놓고 본다면 영화는 이보다 더 진부할 수 없을 것 같은 동화다. 영화의 배경 설정도, 선생님과 친구의 존재까지도 세상에 존재하는 성장소설의 전통이란 전통은 다 모아놓은 것 같다. 그러나 미술감독은 소임을 다했다. 문득 진부해 보이는 것들을 완벽하게 다듬으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알려주려는 것 같다. 




     황량하고 차가운 바닷가, 안개가 자욱한 삼나무 숲, 버려진 기차, 바닷바람에 몸을 내맡긴 집, 폐선 속에 만들어 놓은 비밀의 제단. 조각조각 빛나는 클리셰들을 가져다가 잘 연마해서 붙여놓았다. 가장 좋은 건 이 애들이 절벽 위의 호밀밭에서 뛰노는 애들 같다는 점이다. 학교가 파한 뒤 광활한 숲과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해야 할 일들을 한다. 어른들의 간섭 없이 자기 세계에 흠뻑 뛰어들어 있는 그 분위기가 좋다. 마법의 숲으로 들어가는 티켓을 직접 찾아내 손에 쥔 아이들의 거친 자유로움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내가 중학생 때는 누리지 못했던,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감각을 잠시나마 맛보고 그게 참 좋았다. 어릴 때는 원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울타리에 갇혀 있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나를 보호해줄 울타리를 필사적으로 잡고 매달려 있는 기분이다. 이 애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고, 눈앞에 있는 거대하고 무서운 것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껏 충실할 수 있다.


     친구는 이 영화를 보고 "어른들이 노는 방법을 정해주기 전에 놀던 방식을 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고 했는데, 내가 느낀 감각도 이 비슷한 것 같다. 어른들이 스마트폰을 쓰는 것 같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전자 기기나 인터넷, 우리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가이드라인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드물 정도로 아날로그한 영화다. 서사가 흔하더라도 이런 사소한 디테일들이 몰입도를 확 올려 준다. 


     작중에 디앤디 미니어처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영화 자체도 고전적인 던전 앤 드래곤 스토리다. 교훈이 있고, 보스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보상으로 경험치를 얻는 이야기다. 늘 반복되지만 그래서 익숙하고 편안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다. 편안하고 익숙한 이야기의 완성도를 어디까지 올릴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청소년 일기의 마지막 문장으로 끝을 맺고 싶다.




"참 재미있었다."




"대사가 많다"


        는 게 내가 <스테디레인>에 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팟캐스트 이석준의 이야기쇼에서 이석준 배우가 말한, "올해의 우리의 악몽은 모 배우가 다 가져갔죠". <스테디레인>의 첫 대사가 대본 한 페이지를 가뿐히 넘긴다는 것, 그래서 당시 시즌 첫공을 올렸던 모 배우가 첫 대사를 치고 나서 그 다음 한 페이지 분량의 대사를 모두 잊어버렸다는 일화였다. 대사가 유난히 많아서 대사를 씹을까 늘 걱정이 된다는 말과 A Steady Rain이라는 극 제목이 합쳐져 끊임없이 쏟아붓는 비처럼 대사가 휘몰아치는 연극일 거라는 상상은 했었다.


       하지만 이 극의 장르가 느와르일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차라리 <레드>같은 예술에 관한 토론이거나 뭐 그럴 거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비니까, 끊임없이 비가 내리겠지만 배경이 희거나 녹색이거나 노란색이거나, 뭐 그럴 줄 알았다. 한밤중에 쏟아지는 비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고, 막공이 임박해서 이명행 배우가 나온다니 시간을 쥐어짜서라도 보러 가야지 하고는 파이널 페이퍼를 미뤄두고 보러 갔다. 예매페이지에서 상세정보를 보고서야 경찰이 나오는 느와르물이구나, 했고 내 예상과는 달라서 좀 의외라는 생각도 하고, 느와르를 즐기지 않는 내 취향을 생각하며 걱정도 좀 했다. 어쨌든 노네임씨어터컴퍼니가 올리는 작품이니 노네임이 좋아하는 텍스쳐가 있을 것이고 그럼 나도 좋아하겠지, 그리고 설령 정말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해도 어쨌든 이명행 배우가 나오니까, 이명행 배우의 작품 고르는 취향을 생각하면 정말 내 취향이 아닐 리는 없겠고 정말 내 취향이 아니어도 이명행 배우의 연기와 목소리는 있는 거니까, 그러면서 갔다.




      결론부터 말하면 좋았다. 아름다웠다. 이명행 조이, 김수현 대니 캐스팅으로 보았는데 두 배우의 연기 스타일의 간극이 만드는 역학관계도 무척 좋았고 두 배우의 외모와 분장이 만드는 케미도 좋았다. 수트를 입은 두 순경의 외모는 두 사람의 성격과 성장배경, 관계까지 드러낸다. 마르고 키가 큰 조이는 세상에 아무것도 중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한 장의 텅 빈 종이처럼 허정하다. 차콜색 수트를 단정하게 차려입고 늘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길고 마른 얼굴에 차분하고 단정한 목소리는 체념할지언정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법이 없다. 아침마다 손수건을 다려 주머니에 접어넣을 것 같다. 반면 대니는 짱돌처럼 단단하고 다부지게 생겼다. 조이보다 키는 좀 작지만 얼굴과 몸에는 적당히 살집이 있고, 붉은 기가 도는 갈색의 줄무늬 수트를 입고 있다. 늘 얼굴에 감정을 가득 담아 조이를 노려보고 있다. 늘 자기 앞을 똑바로 보고, 자신의 손에 쥔 것을 죽어도 놓지 않으려고 한다. 전형적인 아일랜드계의 염세주의와 이탈리아계의 다혈질의 조합이다. 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서로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불알친구이자 늘 함께 근무하는 파트너다. 

      


*****이후 분량에는 연극의 줄거리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비가 엄청나게 왔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던 날 빗속에서 모든 일이 벌어진다. 부수입을 얻으려고 포주들과 매춘부들의 일에 개입한 대니는 포주의 원한을 사고, 포주가 쏜 총에 대니의 거실 창문이 박살나면서 대니의 가족이 부상을 당한다. 대니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모든 이성적인 판단을 뒤로 하고 달려든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환원 구조: 진입, 갈등, 재진입, 승계




      번듯한 집과 "쌔끈한 아내, 토끼같은 새끼들, 방방마다 있는 텔레비전"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내내 역설하는 대니. 대니는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다. 문제는 대니의 방식이 다른 사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철저히 자기 본위의 사고와 행동이라는 것이다. 가족을 지키는 대니의 방식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복수다. 이것을 하는 데 경찰의 공무집행 도구와 권위를 사용하고 그러기 위해 공무마저 내팽개친 대니는 결국 정직 처분을 받는다. 그러는 동안 대니의 가족은 대니에게 천천히 등을 돌린다. 대니의 행동은 실질적으로 가족을 지키지 못했고, 가족을 계속해서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만 낳았다. 대니가 사적인 복수를 하고, 공무를 내팽개치고 "검은색 신형 르망"을 쫓아다니는 대신 정해진 절차를 밟아 가족을 경찰의 보호 아래 두고 수사를 요청했다면, 가족은 더 나은 환경에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았을 것이다. 대니는 다친 두돌짜리 아들을 병원으로 수송하기 위해 구급차를 기다리지 못하고 시카고 컵스의 경기가 막 끝난 거리로 경찰차를 몰고 돌진하다가 심지어 대니의 집으로 출동한 구급차와 충돌 사고를 내는 바람에 아이의 치료를 지연시키고 경찰에서는 징계를 받는다. 그러나 대니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조이가 말했듯 대니에게는 "내 가족을 내 손으로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 아주 중요했다. 또한 여러 번 형사 진급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도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진급에서 밀린 대니는 형사들을 믿지 않고, 형사들이 자신의 가족을 제대로 지켜줄 거라는 신뢰를 갖기도 어려운 상태다. 대니는 여러 번 "내 가족이고, 내 집이고, 내 텔레비전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파트너 조이에게조차도, 공무를 우선 집행하고 가족의 수사는 형사에게 맡기자는 조이의 멱살을 잡으며 "네 가족이 아니고 내 가족이다"라는 말로 조이를 밀어낸다. 자신의 것을 스스로 지키는 가부장으로서의 자리는 대니에게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제1원칙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바깥으로 나도는 아버지는 가족에게서 멀어진다. 대니는 부상당해 병원에 다녀온 아들 노엘이 심적 고통을 호소하며 방의 불을 끄지 않고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달라고 하자 아들의 나약함을 탓하며 볼기를 때린다. 대니에게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자라면 그래야 하니까. 그러나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원칙을 그대로 아들에게 부여하자 아들은 대니가 원하는 대로 강해진 것이 아니라 조이의 보살핌에 자신을 맡긴다.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대니가 복수를 위해 바깥으로 도는 동안 가족이 없는 조이는 대니 대신 대니의 가족을 챙긴다. 잠들기 무서워하는 노엘을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반복해서 읽어 주고, 대니의 행방과 대니의 상황을 대니의 아내인 코니에게 전해 준다. 계속되는 포주 월터의 끈질긴 괴롭힘에 분노와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뛰쳐나간 대니 대신 대니의 두돌짜리 아들 스튜이가 부상 합병증으로 급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에 코니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간다. 대니가 바깥에서 복수하는 동안 조이는 대니 가족의 경비견이 된다. 





      그렇게 조이는 대니와는 다른 방식으로 대니의 자리를 계승한다. 대니는 자신과 다른 자신의 친구가 자신의 자리를 꿰찬 것에 질투하고 분노하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사적인 복수를 위해 공무를 소홀히 한 탓에 정직 처분을 받고 나자 조이에게 자신의 가족을 승계한다. 조이 역시 대니의 반경 안에 든, 자신이 챙기고 지켜야 할 가족이었으니까. 대니와 조이는 출동 신고를 받고, 골목에서 발가벗은 채 도망치는 베트남 소년을 붙들게 된다. 이때 선량해 보이는 한 남자가 나타나 자신이 아이의 보호자이니 아이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조이는 신원이 불분명한 이들을 우선 경찰서로 연행하자고 주장하지만, 때마침 검은색 신형 르망이 건너편 주유소에 나타나자 그것을 쫓아가고 싶은 대니는 조이를 남겨두고 경찰차를 타고 그쪽으로 가버린다. 결국 조이도 그 "선량해 보이는" "이유를 잘 댄" 남자에게 소년을 인계하고 그 자리를 뜨고 마는데, 그 남자는 사실 식인마였고 베트남 소년을 죽인 뒤 장기를 떼고 남은 시체를 마당에 묻은 것이다. 그 밤에 소년과 조이, 대니를 목격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결국 조이와 대니는 모두 정직 처분을 받고, 변호사를 찾아가 상담한 결과 한 사람은 복직을 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은 모든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야 하니 따로 변호사를 구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한편 대니는 계속해서 월터를 쫓다가 월터의 동생을 추격하고, 그가 품 안에 손을 넣자 거기에 총이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소년을 향해 발포한다. 그러나 품 안에 있던 것은 총이 아니라 강아지였고, 대니는 무고한 시민을 죽인 경찰이 된 상태에서 월터와 시비가 붙어 월터마저 쏘아버리고 만다.



      이 과정에서 대니와 조이의 관계와 거기서 비롯하는 친밀감과 갈등들이 표출된다.  조이는 대니에 의해 "내 것"이 되었다가 "내 것"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었다가, 다시 "내 것"의 세계로 들어간다. 대니는 조이를 챙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대니는 조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이해할 생각이 없다. 도대체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은 "매춘굴 쪽방"에 살면서 알코올 중독이고, 가족도 꾸리지 않고 집이나 텔레비전을 살 생각도 하지 않는 조이는 대니의 관점에서는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을 모르는 친구다. 대니는 자신의 반경 안에 있는 조이를 "제대로 살도록" 해야 할 사명감과 의무감을 느낀다. 이것은 대니가 자신의 가족, 아내와 아이들을 향해 느끼는 감정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러나 조이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보일 때 대니는 조이를 경계하고 밀어낸다. 그러나 대니는 결국 조이를 다시 받아들이고, 자신의 위치를 승계하는 결정까지 내리게 된다. 대니는 언제나 조이를 이겨먹었고, 한 번도 조이에게 질 거라는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집 마당에서 처음으로 독기를 품고 자신과 대적하는 조이의 주먹에 맞고 쓰러질 때, 대니는 자기가 이제껏 몰랐던 것을 깨닫는다. 자신의 확신과 결정이 절대 바라지 않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과 조이에게 자신이 모르던 힘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틀리고 조이가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대니는 조이를 자신과 동등한 자로 인정한다. 자신의 보호가 필요한 친구가 아니라 자기 없이도 스스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임을 확인한다. 이때 "내 것"의 세계로 재진입한 조이는 승계자로서의 자격을 갖게 된다. 이것은 조이가 자신의 가족이 아니라 친구였기에 가능한 결정이다. 언제나 늘 자신에게 지는 친구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먹여살려야 할, 자신이라는 가부장에 딸린 식구가 아니라 자신의 파트너였기에. 그렇기에 대니는 코니에게는 절대로 맡길 수 없는 자기 가족의 가장 역할을 조이에게는 승계할 수 있는 것이다.



     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된 이유도 자신으로부터 비롯했고, 가족을 지키려는 자신의 모든 노력들은 오히려 자신과 가족을 모두 수렁에 빠뜨리고 말았다는 것을 자각한 대니는 이미 자신보다 조이를 우선적으로 신뢰하게 된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조이에게 맡기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조이는 대니의 자리를 승계한다. 조이는 대니의 집을, 대니의 가족을 지키는 가장이 된다. 대니가 가족의 복수를 행하는 동안 역설적으로 대니로부터 소외된 대니의 가족은 이미 조이와 충분한 신뢰와 애정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에, 이 승계는 대니의 사후 대니의 의지와는 상관없어 보일 정도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조이가 "대니가 주던 것과는 다른 것을 대니의 가족에게 줌으로써" 대니의 가족과 신뢰를 형성했음에도, 조이는 단순한 가족의 일원, 혹은 대니와는 다른 새로운 방침을 가진 가족의 수호자가 되지 못하고 대니의 계승자로서 존재한다. 조이는 극 내내 "대니의 거실"을 침범하고 "대니의 아내"와 친밀감을 나누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너무 자주 대니의 집에 방문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고, 대니의 아내 코니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후로는  가장 친한 친구의 가족을 빼앗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그는 "대니의 거실에서" 환한 빛을 받고 있는 "내 가족"을 본다. 그는 대니의 존재와 그 존재가 이 집에서 어떤 것을 구현하려고 했는지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극의 클라이막스에서 대니가 자신의 뜻을 거스르려는 조이를 "몇 대 두들겨 패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했을 때, 대니는 늘 자신에게 지던 친구가 자신과 맞서는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대니는 늘 자기 손에 쥔 것을 어떻게든 지키려는 사람이었고, 조이는 자신의 손에 쥔 것이 중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두 사람의 갈등에서는 언제나 대니가 조이를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조이에게는 스스로 지키고 싶은 것이 생겼으므로 대니는 조이의 눈 속에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지키는 자"의 빛을 본다. 이 순간은 대니와 조이의 가장 첨예한 갈등의 현장이면서 갈등이 소강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니가 조이에게 자신을 투사하고 조이는 대니를 승계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다. 조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대니의 가족이고, 그는 이미 대니의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며, 그 순간 대니는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이 서사에서 자신에게 남은 역할까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순간 조이를 때리면서 대니는 자신이 무대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지극히 남성적인 이 갈등 해소 행위는, 때리는 자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 맞는 자는 폭력에 굴복하고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전통적인 귀결에서 벗어난다. 때리는 자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맞는 자는 자신에게 힘이 있음을 자각한다.


      극의 마지막에서, 조이는 개를 산책시키러 나가면서 새로 유리를 해 넣은 거실 창으로 자신의 가족을 본다. "저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조이의 마지막 대사는 극 내내 대니가 되뇌던 말이다. 조이에게도 "처음으로 내가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이렇게 대니의 죽음은 대니와 조이의 관계를, 유대를 넘어 일치까지 발전시킨다. 이 극은 남성의, 남성에 의한, 어떤 방식으로 남성의 사회가 구성되고 돌아가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극이 대니의 욕망을 긍정하는 방식




       이 극의 정교한 구조가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선결조건이 필요하다.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원인인 대니의 욕망을 숨김없이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대니가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감정이, 어떤 성취에 관한 욕구가 대니를 움직이는가. 이 지점을 간과해버리면 극은 요즘 말로 흔한 '알탕' '개저씨' 극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스테디레인>은 그러지 않았다.  이 극은 자신이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아주 성공적으로 아름답게 성취했다. 


      최근 친구에게 아버지와 나의 이야기를 했다가, 가부장제의 언어가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지에 관한 평을 들은 적이 있다. 집에 단 둘이 있을 때, 아버지가 내 방 문을 두드리고 "밥 먹자"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함께 식사하자는 뜻이 아니라 나에게 나와서 밥을 차리라는 뜻이다. 거기에는 내가 밥을 차려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욕망이 포함되어 있고, 나는 심지어 거기에 단순히 집에 있는 밥과 반찬을 꺼내 식탁에 차리는 것만이 아니라 따뜻한 새 요리 한두 가지를 포함하여 국물이 있는 밥상을 내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들어 있다는 것까지 알아차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불을 사용해서 밥을 차리게 된다. "밥 먹자"라는 말은 표면적으로 이 모든 요구나 욕망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나의 경험과  위계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욕망과 요구를 감지하고 표면화되지 않은 그것을 충족해 주기 위해 움직인다. 이것이 가부장제의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자신의 욕망을 세련된 언어로 감추고, 심지어 그것이 다른 사람에 관한 배려의 형식과 성격까지 갖게 되는 것이다.



      남성중심 서사 혹은 남성적 서사가 '구리다'는 평을 받게 되는 지점은 흔히 이 가부장제의 세련된 언어와 관련되어 있다. 발화자의 욕망을 지우고 발화자의 사회적 위치에 따른 베품과 배려, 의무를 강조하면서 그것이 지닌 숭고함까지 내포하는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이다. 남성들이 등장해 남성들 사회의 룰에 따라 남성들의 가치를 성취하는 서사에서 이들의 동기를 세련되게 포장하려고 이들을 움직이는 욕망을 지워버리는 순간 극은 두 가지 중의 한 길을 걷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해진다. 부득이하게 폭력과 억압을 시행했으나 모두 식솔들을 위한 일이었음에도 이기적이고 부족한 식솔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한 권위자의 뒷모습(i.e<국제시장>)이거나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과 억압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신적인 위치에서 가늠하고 이해하는 가솔의 존재로 인해 발생하는 신파(대부분의 가부장제 신파극)다. 이것은 일부 21세기 관객들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선사하는 서사라는 점에서도 구리고, 무엇보다 이런 선택을 함으로써 그 서사를 완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패한 것이다. 저 두 가지 모두 주인공을 수식하기 위하여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의 서사를 충족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저런 서사에서 주인공에게 가솔이란 트로피 혹은 상실의 기표, 그가 아니라 하더라도 존재와 판단이 지워진 채 주인공을 위해 봉사하는, 논리 없는 존재가 된다.


      <스테디레인>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이 극이 대니의 욕망을 철저하게 긍정한다는 것이다. 대니의 관찰자인 조이는 "대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대니 역시, 논리를 들먹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매우 논리적이지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계속 힘주어 강조한다. 대니와 조이 모두 대니를 움직이는 욕망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알고 있다. 조이는 대니를 어렸을 때부터 봐 온 사람으로서 이미 알고 있다. 대니는 극이 진행되며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신의 욕망임을 깨닫고, 이 서사에서 필연적으로 귀결하게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최후로 걸어들어간다. 허벅지에서 찔린 상처로 시작해 온 다리 전체를 검푸르게 물들여 버린 대니의 상처는 이러한 대니의 욕망과 그 욕망을 대니가 깨닫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극은 대니의 욕망을 포장하지 않음으로써,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오히려 우아함을 획득한다. 대니의 선택들을 관통하는 것은 대니의 대의도, 가부장으로서 부여된 의무도 아닌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지켜야만 한다는 대니의 욕망이다. 명분이나 대의에 앞서 그가 충족시켜야 할 어떤 느낌이자 갈급이라는 것이다. 대니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우아한 언어로 표현하여 포장하려는 욕망을 버릴 때, 극 전체의 구조는 더욱 우아하고 공고해진다.





2017 남산예술센터 시즌작: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리뷰


*****이 리뷰는 2017년 하반기 남산예술센터 리뷰단으로서 공연을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글은 연극의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1. 소녀

서로 다른 기억과 교차되는 언어: 죽음은 현재형이다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반바지에 나시티. 왜 그랬어요? 언니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2002년, 온 나라가 붉은 악마의 함성과 열기로 뜨거웠던 여름, 고등학생 김혜언은 죽었다. 흉기로 두부를 맞고 학교 잔디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무대 위에 나선 이들에게 김혜언은 여전히 존재하는 기억이다. 동창에게는 도저히 잊기 어려울 정도로 예쁜 아이였기 때문에, 어떤 이는 미제로 남은 사건의 목격자였기 때문에, 어떤 이는 용의자였기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덮어도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기에, 가족에게는 가족이기 때문에.

무대 위에 전시되는 것은 김혜언이라는, 자의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 같은 한 인간에 관한 여러 개의 기억이다.
연극은 산 이들의 증언으로 이뤄진다. 과거를 불러오는 말들과 현재를 표현하는 말들 사이에서 표출될 길 없는 감정은 난데없는 비틀기 춤으로 발산된다. 김혜언의 존재를 기억하는 말들, 김혜언이 죽은 뒤의 각자의 삶을 서술하는 말들, 김혜언이 없는 현재를 표현하는 말들이 이어진다.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는 김혜언은 언어로 이뤄진 기념비 같은 존재다. 정어리 떼가 대형을 바꾸듯, 서술하는 이가 달라질 때마다 김혜언은 형태를 바꾼다. 말들은 겹쳐지지만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한 무대 위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각자의 입으로 김혜언을 방백한다. 피카소의 그림이 그려진다. 관객은 각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짜맞추며 퍼즐 맞추듯 김혜언을 맞추려 노력한다. 무대 위의 인물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김혜언에 관한 이미지와 경험을 완고하게 지킨다. 인물들의 말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김혜언은 살아 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요구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죽은 후에도 스스로에 대한 단서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김혜언에 관한 것은 모두 이미지뿐이다. 김혜언의 생각과 김혜언의 말은 드러나지 않는다. 김혜언은 "브래지어는 물론이고 팬티도 입지 않은 채 학교에 가는" "원피스형 잠옷을 입고 무릎을 벌린 채 인형처럼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 감출 것이 없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의 몸은 타인에 의해 챙김을 받고, 타인에 의해 살해되고, 타인에 의해 재구성된다. 우리는 김혜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김혜언의 몸에 대한 타인들의 시선뿐이다.

김혜언은 사건이고, 죽음이고, 그림자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어떤 식으로든 김혜언과 관련되어 있다. 김혜언의 죽음 후 15년, 김혜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무대에 모인다. 이 연극의 주인공인 김다언은 김혜언의 동생으로 태어난 이래 김혜언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자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형이자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김혜언이 어떻게 어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가. 자신의 뜻을 말한 적도 행동으로 내보인 적도 없기에 김혜언의 모든 순간은 오로지 타인의 시선과 경험에 의해 재단된다. 김혜언의 삶은 타인들의 오해로 이루어졌고, 김혜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몇 겹의 오해들 속에 감춰졌으며, 김혜언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유형有形적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 언어로 김혜언을 쌓아올리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며, 자신과 어머니의 상처를 치유하는지, 오히려 소금을 뿌리는지 불분명한 김다언의 성형은 "그래서 좀 괜찮아졌니?"라는 상희의 말에 "뭐가 괜찮아질 수 있어요?"라고 반문하는 효과만을 낳는다. 김다언은 어떤 포즈pose를 통해서만, 무형적이고 가변적인 순간들을 통해서만 혜언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몸을 마구 흔들며 비틀기춤을 추는, 해석하기 어려운 순간에만 말이다. 평생 김혜언을, 김혜언의 죽음을, 김혜언을 잃은 어머니의 행동들을, 김혜언을 잃은 자신의 마음을, 김혜언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의 말을 해석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 김다언은 언어나 해석이 아닌 순간과 포즈 속에 잠시 몸을 맡긴다.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2. 이름

이름이라는 용기container


"언니 이름은 원래 혜은이였대요. 김혜은. 언니 이름이 혜은이였으면 내 이름은 다은이가 됐겠죠."

다언은 끊임없이 혜언과 자신의 이름이 결정된 순간을, 그 이유를 말한다. 위의 대사는 연극 내내 반복된다. 다언의 이름은 혜언의 이름이 결정된 순간 함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혜언의 출생신고를 한 순간에는 생길지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던 다언은 몸보다 먼저 자신에게 붙여질 이름의 한 글자를 가졌다.
이름은 그릇이다. 언니의 이름 한 글자가 포함된 이름을 가질 운명을 타고난 다언은 언니를 끊임없이 챙겨야 하는 운명에 처하고, 언니를 절대 잊을 수 없는 운명에도 처한다. 가족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돌림자가 다언에게 형벌처럼 얹혀 있다. 다언의 삶의 한 자락은 혜언의 출생신고와 함께 결정되었다. 다언에게 언니의 그림자는 언니가 죽은 순간이 아니라 언니가 존재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드리워진 것이다. 이름은 얼굴을 비롯해서 성격과 성향까지 아무것도 닮은 것이 없는 자매를 하나로 묶어준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언에게는 혜언을 사랑할 의무가 생긴다.

본래 혜언의 이름이 될 뻔한 이름, 혜은은 혜언이 죽은 뒤 혜언의 어머니에게 절대적인 것이 된다. 혜언의 어머니는 이름이 가진 주술적 효과를,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오래된 미신을 맹신하기 시작한다. 혜언의 이름이 혜은이었다면 혜언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가정법원에 가서 이미 죽은 혜언의 이름을 고쳐달라는 개명 신청서를 내고, 개명신청이 기각되자 온 집안의 문서를 다 뒤져 혜언의 이름을 찾아 일일이 혜은이라고 고친다. 이름은 살아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해 부르기 위한 이름이다. 그러나 다언과 어머니를 일생 지배한 이름은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을 고치는 행위는 다른 이름이었다면 죽은 이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덧없는 몸부림이기도 하고, 죽은 이를 잃은 사람을 무위하나마 위로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가정법원에서 개명신청을 기각당한 다언의 어머니는 오열한다. "우리 딸이 죽었다는데, 딸이 죽었는데 그것 하나 못 해줘요" 절대적이고 잔인한 진실, 사람이 죽었고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진실 앞에서 사회적 약속을 하나 고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불러볼 일도 없는 이름 한 글자를 바꾸겠다는 게, 사람이 죽었다는데, 뭐 그리 문제될 일이어서 못 해주나 싶다. 죽은 이를 개명하는 일은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고통과 무위함을 언어로 담아내고자 하는 몸짓이다. 어떤 용기에도 들어가지 못할 감정들을, 너무 커다란 파도라서 일상의 모든 일을 멈추고 집 안에 틀어박혀 생활을 모두 정지할 수밖에 없는 커다란 사건을 이름이라는 용기에 우겨넣으려는 무리한 몸짓이다.

한편 다언은 자신의 얼굴에서 언니의 얼굴을 찾아내려는 어머니의 시도를 읽고, 언니 사진을 들고 가 성형수술을 감행한다. 수술은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다언은 이름 한 글자가 겹치는 만큼은 언니와 닮은 얼굴을 가지게 된다. 이름이 얼굴을, 언니를 담는 그릇이 된다.


또한 혜언의 이름은 그 근원부터가 혜언의 본질을 담고 있다. 모두에게 오해받는 혜언, 아무에게도 본질을 보여준 적이 없는 혜언의 근원은 잘못 불린 이름으로부터 출발했다. 본래 혜은이 될 것이었던 혜언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아버지를 가진 덕분에 혜언이 된다. "어차피 애 아빠가 계속 혜언아, 혜언아 하고 부를 건데 그냥 혜언이라고 해도 좋겠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가진 것부터가 아버지의 잘못된 발음 때문에 얻게 된 이름이라니. 아버지는 자신의 발음에 관해 설명하거나 부연한 적이 없고,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노력 없는 현상 유지가 혜언의 이름을, 혜언의 분질을 만들었다. 그 아버지는 혜언을 끔찍하게 사랑하다가 혜언이 일곱 살, 다언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숨진다. 아버지의 의도는 없는, 갑자기 개입한 트럭 때문에 두부를 다쳐 죽는다. 아버지와 혜언의 죽음은 닮아 있다. 갑자기 개입한 사고로부터 자기방어 없이 죽었다. 

혜언의 이름은 아버지의 '말'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언'자는 그 글자대로 말씀 언言을 연상시킨다. 말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자기를 말하지 못해 겹겹이 쌓인 오해 속에서, 침묵 속에서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무대

타임라인은 직선으로 흐르는가?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무대는 정연하다. 조금 긴 암전이 끝나면, 길고 두꺼운 가로줄 무늬가 정연하게 그어진 무대 바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줄무늬에 맞추어 몇 가지의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2인용 가죽 소파와 길고 둥근 등받이를 가진 일인용 나무 의자, 푹신해 보이는 일인용 소파와 거실 텔레비전 맞은편에 놓여 있을 것 같은 아담한 소파, 가죽 쿠션이 대어진 의자들이 줄무늬를 벗어나지 않고, 무대의 가운데 부분을 비운 채 양옆으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의자들이 보는 방향은 모두 다르지만 줄을 벗어난 의자는 없다. 조명이 무대를 비추면, 바닥에 그려진 줄무늬들이 줄무늬가 아닌 바닥과 다른 색깔을 받아 빛나면서 줄무늬와 줄무늬가 아닌 곳을 구분짓는다. 무대 바닥의 굵은 줄무늬들은 타임라인Timeline을 연상시킨다. 한 단체의 역사를 정리할 때 그어 놓고 시간 순서에 맞춰 줄을 긋거나 서로 다른 색을 칠하며 사건을 표시하는 도표 같다. 인물들의 동선은 양 옆에 의자들을 줄세우고 그 가운데에서 엇갈린다. 어린 시절 문제집에서 자주 보았던 "어울리는 것끼리 연결하시오" 문제가 떠오른다. 두 열 사이를 마구 뒤엉키며 연결하는 선들처럼 인물들은 의자와 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의자엔가 자리를 잡고, 다시 일어나서 돌아다닌다.

이름이 몸을 담는 용기라면 무대는 극을 담는 용기다.

정연한 무대와 정연하지 않은 인물들의 대비가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 무대는 시각적인 소설이나 대본 같다. 언어로 오래 설명할 것들을 한 장의 그림이나 한 장면의 시연으로 붙들어둔 것 같다. 여기에 덧붙여 극장의 원형극장 형태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관객은 정연하게 정돈된 무대를 내려다보고, 거기에서 뒤엉키는 인물들을 문제 풀듯 눈으로 좇는다. 무대의 사면이 막혀 있지 않아 타임라인이 끝없이 연장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사각형의 무대 자체가 어떤 커다란 타임라인에서 뚝 떨어져 나온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혀 정연하지 않고,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여러 명의 기억들이 동시상영되며, 인물 각각이 상호작용이나 순서 없이 각자 뱉어내는 말들을 모두 받아 삼킨다. 무대는 이 작품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정돈되어 있는 곳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인물들이 사용하고 있는 무대 부분에만 조명이 비추는데, 그러면 그 사각형 무대에서 또 필요한 부분만 사각형으로 잘라낸 것 같은 효과가 생긴다. 사각형 속에서, 사각형에 가둘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흐르고 넘친다. 사각형이 품을 수 없는 대사들은 대부분 짧고 긴 침묵 속에서 오래 굳고, 그러다가 끝내 정리되지 못하고 튀어나온다.
 



終. 말, 언어, 시詩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세상에 내던져진 순간부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으로 무엇도 하지 않는 생명체, 그러나 빼어나게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으로 주변의 모두를 매혹하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진저리나는 이해할 수 없음과 이해하고 싶지 않음의 대상인 사람이 김혜언이다. 동생 김다언에게는 끊임없이 챙겨야 하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 욕구를 돌보아 주어야 하고, 모습이 정연한지 살펴야 하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을 넘어서는 곳에 있는데도 자신이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진저리가 나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방기해 버린 존재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존재,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존재로만 말하고, 그러므로 타인에게 끊임없이 오해되고, 스스로 설명하지 않았는데 타인의 내부에서 타인에 의해 설명되어버리는 존재다.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속옷도 입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크리스트에게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유혹하려 한다고 해석된다. 스스로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부연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반반한 것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공부를 못하고, 결국 머리가 텅 비었다는 판정을 받고 만다.

 김혜언의 이러한 속성들은 말의 속성이다. 김혜언은 실체화된 언어다. 언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정제된 언어는 더욱 그렇다. 나의 언어를 세상으로 내놓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이 고정되므로 끊임없이 살피고 검열해야 하지만, 오롯이 책임을 지는 것이 버겁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내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이 말을 수용할 청자들의 책임일 뿐,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던져버리는 존재. 그리고 그 순간 비극은 찾아온다.

이런 맥락에서 시를 썼던 상희의 존재와 시를 쓰고 싶어하는 다언의 존재는 맞닿는다. 시를 쓰는 상희는 학교 교실에서 혜언을 보자마자 그 완벽한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잃는다. 상희의 언어는 혜언을 찬미하는 데 바쳐진다. 혜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혜언의 외모에 매료되고, 그 외모를 묘사하는 데 자신의 언어를 바친다. 다섯 살 때부터 끊임없이 혜언을 챙겨 온 다언은 그 존재에게 진저리를 낸다. 다언은 혜언을 쫓아다니는 존재, 아름다운 몸을 놀려 고요하게 도망치는 혜언을 쫓아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존재다. 그들 둘 모두에게 혜언은 잡히지 않고, 결국 둘의 머리 위에 그림자만을 드리운 채 혜언은 죽어버린다. 시 쓰기를 포기하고 다언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하는 상희와 끊임없는 해석의 몸짓을 포기하기까지 먼 길을 돌아와야 하는 다언은 대학 선후배로 문학동아리에서 만나고 글쓰기 교실에서 만나고 마침내 국립도서관 로비에서 만난다. 기록된 언어들로 가득한 곳에서 마지막으로 조명을 받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


소녀의 몸과 소녀의 이름이, 언어와 육체가, 정연하게 그려 놓은 직선의 타임라인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온갖 모양으로 형태를 뒤틀다 마침내 발산하듯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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