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게 된 건 황금가지가 인용한 <릿허브>의 추천사 때문이었다.
— “젠장, 세상이 끝나면 어쩌지”와 “젠장, 세상이 안 끝나면 어쩌지”의 중간에 살고 있다면 딱 맞는 작품.
나는 세상이 안 끝나면 어쩔지 고민하는 쪽이다. 지구온난화와 비인도적인 가축 사육에 대해서 고민할 때도 그렇지만 대체로는 내 삶에 대해서 고민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이 이대로 계속 굴러간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은 대부분 나의 쓸모에 대한 생각으로 귀결된다. 내가 이렇게 계속 쓸모가 없다면, 이렇게 망망대해를 영원히 표류하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면, 목표가 너무 많아서 헷갈리고 그 중에 아무 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면, 도달해야 할 목표가 너무 멀어서 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왜 살아야 하지? 세상에 내가 필요하긴 한 건가? 이런 생각은 차라리 지금 당장 세상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엄청나게 화려한 불 쇼 같은 대규모 운석 충돌이나, 지구에 있는 모든 화산이 동시에 폭발하는 모습을 담은 드론 촬영 영상 같은 걸 상상하면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어떤 요인 때문에, 전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자연재해 때문에, 아무도 나에게 책임 소재를 묻지 않는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이 돌연 끝나버린다면, 그렇게 돌연한 상황, 아무 맥락 없는 상황, 아무도 상상해본 적 없는 상황에 나는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어떤 예상도 들어맞지 않으므로 더 이상 예상을 할 필요가 없고, 어떤 루틴도 따를 필요가 없고,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모두가 공평하고 평등하게 할 말을 잃은 상황에서 나는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단절>>은 내가 상상한 것처럼 돌연한 방식으로 이전에 존재하던 세상을 끝낸다. 그러나 내가 상상한 것만큼 단숨에 세상의 숨이 끊어지지는 않는다. 세상은 한 권에 걸쳐 서서히 그 모습을 바꾼다. 선 열병이라고 불리는 포자 감염 질병이 뉴욕을 강타한다. 사람들은 천천히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유 서비스가 각자 다른 속도로 작동을 멈추고, 공공 서비스가 그 다음으로 끊어진다. 재택근무와 휴가는 해당 직원이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선 열병에 걸려 천천히 죽어간다는 뜻이다. 이런 세상에서 중국계 미국인이자 이민 2세대인 주인공 캔디스는 몇 남지 않은 선 열병에 감염되지 않은 생존자다. 소설은 캔디스가 캔디스를 포함하여 아홉 명으로 구성된 작고 폐쇄적인 생존자 집단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하여, 캔디스의 과거와 현재를 조밀하게 엮어 낸다.
캔디스는 뉴욕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생존자로, 밥이라는 통제적이고 지배욕이 강한 남자의 인도 하에 시카고에 있다는 복합 문화 시설로 가는 로드 트립에 합류한다. 이들은 움직이면서 마트나 복합 쇼핑몰이나 개인 주택을 털어 미래를 도모한다. 당장 사용할 물품뿐 아니라 미래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품들까지 닥치는 대로 모으며 시카고를 향해 천천히 이동한다.
<<단절>>은 지금까지 나온 중 가장 평화로운 좀비 소설이다. 선 열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언어를 잃고,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루틴을 반복해서 재현한다. 좀비처럼 다른 세계를 향해, 더 이상 자신들이 속해 있지 않은 인간들의 세계를 향해 쏟아지듯 달려나오는 대신,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들을 집 안에, 익숙한 장소에, 익숙한 시간에, 매일의 루틴에 가둔다. 식탁에 앉으면 몇십 번이고 저녁 식사를 차리고 먹고 치운다. 화장을 하고 직장에 나가고 아무 의미 없는 업무를 처리하고 상한 음료를 마신다. 그러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서서히 말라 죽어 간다. 그들은 다른 좀비들처럼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떼를 지어서 몰려오지도 않고, 생존자들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척한다. 자연스럽게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의 몸에 어떤 영양분도 공급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계속 공급하는 척한다. 이 새로운 유형의 좀비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외부로부터 단절되고, 세계는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다.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이 유지하던 사회 인프라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결이 끊어진 세계는 원시적인 소규모 공동체로 굴러간다. 돈이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 온갖 물건들이 가득한 마트나 상점을 습격하고, 필요한 물건과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까지 트렁크에 가득가득 욱여넣는 광경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소비자들에게 풍족함을 대리 체험하게 함으로써 순간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과잉 생산되어 쌓여 있다가 과잉 소비될 물건들은 이 소설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등장하면서 서서히 독자의 숨통을 죄인다. 어디든 마음대로 총을 쏠 수 있고,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약탈해서 얻을 수 있으므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길거리에 무한히 널려 있는 셈이다. 어쩌면 현대 독자들이 가장 해방감을 느낄 그런 장면들은 반복되면서 당연한 것이 되는데, 그렇게 모아 놓은 물건들이 그보다 더 많은 물건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초라하고 하찮아 보인다는 것이 슬프고 우습다.
재미있으면서도 섬뜩한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처음으로 출장을 간 캔디스가 “가짜 화폐 같은 외화를 써버리고 말겠다는 탐욕스러운 광기”라고 묘사하는 홍콩에서의 쇼핑이 그렇다. 아직 선 열병이 발병하기 전, 사람들이 습관의 노예가 되기 전, 자기가 하는 일이 적어도 무언가를 돌아가게 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던 시절에, 캔디스는 홍콩 야시장을 걷다가 죽은 사람들을 위한 지전과 종이로 만든 물건들을 파는 가게를 발견한다. 캔디스는 부모님을 위해 지전을 구입하고, 룸메이트가 구독하는 온갖 잡지에서 아빠와 엄마를 위한 옷, 신발, 서재가 인쇄된 페이지 등을 찢어내 함께 태운다. 물건들은 처음에는 기본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점점 범위가 넓어진다. 캔디스가 부모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계속해서 불어난다. 그래서 마침내 캔디스는 “아찔할 겅도로 많은 양에 놀라 말문이 막힌 엄마와 아빠가 그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샅샅이 파헤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평생 필요한 양보다도 많은, 영겁의 시간에서조차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양의 물건”을 상상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가지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의 물건들. 그러나 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살며 그만큼의 물건들을 소비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상상할 때 필요할지도 모를 물건들의 양은 항상 실제로 필요한 물건의 양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단절>>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단절된다. 처음 봤을 때는 제목이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단어여서, 두 음절짜리 단어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단절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쓰이고, 보통 상태가 심각할 때 쓰이고 — 단절된 관계와 단절된 전선과 단절된 통신은 서로 이어져 있는 아주 가느다랗고 너덜너덜한 선조차 없다는 의미고, 단절 이후에는 단절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 재고의 여지가 없을 때 쓰인다. 소설에서 모든 단절되는 것들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다. 진짜와 가짜의 사이를 가르고, 과거와 현재의 사이를 가르고, 일상과 비일상 사이를 가르고, 거대한 크레바스처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단절된 두 상태 사이에는 항상 중간지점이 있다. 중간지점은 단절된 양쪽 중에 어느 쪽도 택하고 싶지 않을 때 들어갈 수 있는 대안적인 상태이면서 완전히 뒤틀려서 기형적으로 변한 상태다. 그리고 이 소설 전체가 그 중간지점이다. <<단절>>은 캔디스 첸의 성장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의 처음과 끝 사이에 있는 모든 서사는 캔디스 첸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기 위한 중간지점이다. <<단절>>은 끊임없이 캔디스의 현재와 뉴욕에서의 과거 일상, 유년기, 캔디스의 부모님의 이야기를 오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뜨개질로 다리를 짜듯이 이전의 캔디스와 이후의 캔디스를 매개한다.
<<단절>>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캔디스의 배경과 현재다. 캔디스는 설정상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인물이지만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될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모순점이 소설 내내 독자들을 미국, 캔디스 가족의 뿌리인 푸저우, 캔디스의 유년기를 보낸 곳인 솔트레이크시티, 캔디스가 동화되고자 했지만 영원히 동화될 수 없었던 뉴욕으로 동시에 잡아끈다. 캔디스는 뉴욕 시민이지만 동시에 관광객이다. 캔디스는 사진을 찍으러 뉴욕 곳곳을 다니면서 자신이 관광객으로 보이기를 바란다. 그건 캔디스의 외형, 아시아계의 얼굴과 신체 때문이다. 캔디스는 뉴욕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럴 바에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뉴욕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캔디스에게는 고향이 없다. 태어난 곳은 여섯 살에 떠났고 부모는 캔디스가 대학을 마치기 전에 죽었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집은 타인에게 매각되었고 가족의 모든 소유물은 솔트레이크시티의 창고, “차디찬 상자 모양의 보관 시설”에 보관되어 있다. 캔디스에게는 자신의 뒤를 받쳐 줄, 뿌리가 어디인지 상기시켜 줄 가족이 단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캔디스는 미국의 어디를 가든 그곳의 관광객이며 외부자다.
캔디스가 백인 소녀였다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더라도 캔디스가 겪었던 문화가 미국의 주류 문화인 한 캔디스는 어디에서든 자기 자리를 쉽게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캔디스는 모두에게 익명의 공간인 뉴욕으로 피신하기를 택했다. 자신의 유년기 경험과 자신이 밟고 선 지형을 함께 엮어내지 못할 때 우리는 불안해지고, 그곳의 문화와 우리 자신이 단절된 느낌을 받는다. 캔디스는 뉴욕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살아 본 적 있는, 실제로 땅을 밟아 보기도 전에 대중의 상상을 통해 어느 정도는 살아본 적이 있는 유일한 도시”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뉴욕이 대중 매체를 통해 모두에게 익숙한 도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에게 동일한 약속의 도시이며 모두에게 익명성을 보장하는 도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매체를 통해 뉴욕을 보고 느껴본 사람들은 뉴욕에 거짓 향수를 갖게 되고, 뉴욕에서라면 자기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예측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그러나 그 기대마저 캔디스의 것은 아니었는데, 캔디스의 목적지는 구체적인 꿈이나 장소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네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단다”라는 부모의 명제이기 때문이다. 캔디스는 무슨 일을 하든 근면하고 성실하게 임한다. 심지어 무직 상태일 때조차 매일 아침에 일어나 동일한 루틴을 따라 씻고 동일한 루틴을 따라 산책하고 사진을 찍는 일과를 주 5일 동안 꾸준히 반복한다. 그건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다는, 혹은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순응하겠다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캔디스는 하룻밤을 보낸 상대들의 침대에서 아침나절을 뭉그적거리며 그 남자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궁금해한다. 그들이 어떤 구체적인 상을 가지고 있고 그걸 얼마나 실현시켰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캔디스에게는 실상 선택권이 없다. 대학 시절 캔디스가 산업 지구들을 찍으러 다녔을 때, 그곳 술집의 남자는 미국에서 자란 캔디스에게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넌 여기 사람이 아니야. 넌 우리를 모르잖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캔디스 역시 자신이 포착하고 싶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작업을 중단했다고 말한다. 결국 캔디스는 하룻밤 만난 남자가 소개해 준 남자의 형이 하는 회사에서, 근면하고 꼼꼼하다고 평가 받는 중국계 미국인 사무직 노동자가 된다. 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 때는 “매주 금요일 밤” 뿐이고, 돈을 벌어서 “시세이도 얼굴 각질제거제와 블루보틀 커피와 유니클로 캐시미어 옷을 사는 사람”이 된다. 물론 캔디스 개인이 선택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캔디스가 미끄러져 들어간 삶이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흔히 요구되는 삶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남자친구 조너선이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첫 번째 장소”가 “네가 한 인간이 되는 최초의 장소이자 네가 네 자신이 되는 최초의 장소야”라고 말할 때 캔디스는 자신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고아로 사느라 그런 삶에 질려 버려”서 “두 발로 걷고 차를 몰며 무언가를 헤매는 삶 속에서는 결코 안정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너선이 말하는 가족은 전형적인 대도시 교외의 백인 미국인 가정을 의미한다. 조너선의 모든 가족은 한 장소에서 평생 동안 살았으며 조너선만이 가족을 벗어나 “혼자 살아가는 첫 번째 장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캔디스의 모든 가족은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벗어나 이미 “혼자 살아가는 중” 이었다. 혼자 살아가는 부모와 함께 자란 캔디스는 가족과 문화와 동질감 속에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조너선이 요트를 타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헤매는 동안 캔디스는 자기 자식에게는 뿌리 없는 삶이 아닌 다른 것, 제삼의 것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캔디스에게는 뒤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전혀 없다. 선 열병에 걸리거나 걸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고 말할 때 캔디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계속 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캔디스에게 돌아갈 가족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요구되는 미덕이기도 하다. 근면하고, 쓸모 있고, 항상 자신의 쓸모를 타인에게 증명해야 하는 것. 그것이 캔디스의 부모가 캔디스에게 원한 것이었고 캔디스 자신이 원한 것이었으며 미국이 이민자에게 원하는 것이다. 캔디스는 일도 없고 관리자도 없는 상황에서도 꾸준하게 출퇴근 카드를 긁고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기까지 한다.
소설이 던지는 의문은 이렇다. 선 열병에 걸린 사람과 캔디스는 대체 얼마나 다른가? 캔디스는 누구보다 선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살고 있는데 어째서 선 열병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것인가? 이런 의문은 소설의 중반쯤 가서 캔디스의 부모와 캔디스의 유년기, 부모의 삶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바뀐다. 캔디스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가? 이런 삶이 캔디스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캔디스는 갑옷처럼 자신을 두르고 있는 루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변한다. “캔디스의 삶은 얼마나 진짜인가?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느 만큼이 그저 “하는 척” 또는 “아닌 척”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하는 척”과 “아닌 척”은 어디까지가 그저 “척”이고 어느 순간부터 진짜가 되는가?
소설은 진짜와 가짜 사이를 가르는 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단절, 이라는 말은 몹시 정확하고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소설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은 스펙트럼 속에서 진짜 보라색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처럼 불분명하다. 캔디스의 첫 직장이자 유일한 직장의 이름이 스펙트라이고, 캔디스가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스펙트럼? 이라고 되물은 것은 상징적이다. 스펙트라에서 홍콩으로 출장을 갔을 때, 캔디스는 “진품과 모조품 사이에 그토록 정교한 차이가 존재하는 곳”이자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경계선이 그토록 허술해 보이는 곳”이라고 홍콩에 대해 평한다. 공교롭게도 이 모든 것은 홍콩에서의 명품 쇼핑에 국한된 말이지만,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홍콩은 거대한 중간 지점이다. 그리고 캔디스는 미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캔디스는 홍콩에서는 중국과 남아시아에 외주를 맡기는 미국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뉴욕에서는 성실하고 근면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시아계 이민자의 역할을 기대받는다. 캔디스는 평생 양립 불가능한 두 상태의 사이에서, 명확하게 단절된 두 상태를 오가며 살아왔을 것이다. 캔디스의 아빠는 평생 동안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야근과 승진을 반복한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개인은 미국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캔디스의 가족이 고향 푸저우를 방문할 때마다 고향에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사실은 점점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캔디스는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촌인 빙빙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오로지 빙빙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개설한 위챗 메신저에서는 각자의 언어를 구글 번역기에 돌려 상대방의 언어로 만들어낸 피상적인 소통과,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친밀함을 어필하려고 애쓰는 답답한 상태가 반복될 뿐이다. 문화와 문화 사이, 주류 백인들과 다른 피부색의 사이, “예술 소녀” 들과 성경 부서의 성실하고 허약한 중국계 미국인의 사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은 캔디스 가족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선 열병으로 인해 그 모든 경계가 무너져 내렸을 때 캔디스는 비로소 혼자 설 수 있게 된다. 캔디스를 규정하려고 했던 모든 제약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제약의 껍데기가 깨졌다고 해서 캔디스가 마법소녀처럼 곧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변신하지는 않는다. 소설은 캔디스가 루틴에 안주하는 집단의 일원으로 시작해서 홀로 설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캔디스는 이탈을, 다른 궤적의 삶을 꿈꾸고, 결국 그렇게 하게 된다. 캔디스는 처음에는 집단에서 소소하게 일탈하는 작은 무리에 끼어 “마리화나를 피우지는 않지만 차 안에 가득한 연기를 마시며 간접흡연을 하는” 정도의 일탈을 하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향해, 자신에게 처음으로 생긴 구체적인 목표와 구체적인 장소를 향해, 빼앗은 차를 몰고 달려나간다.
의미심장한 것은, 평생 캔디스에게 미국에서 “더 나은 기회”를 잡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던 캔디스의 엄마가 캔디스의 탈출을 돕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캔디스의 엄마는 캔디스의 꿈에 나타나,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구사하지 못했던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며 캔디스에게 도망치라고, 밖에 있는 진짜 삶을 찾아 떠나라고 종용한다. 캔디스의 무의식은 다정한 엄마를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시금 자신의 등을 떠밀어주는 엄마, 루틴 바깥으로 나가 이제 드디어 진짜 삶을 살아보라고 말하는 엄마를 처음으로 만들어낸다.
트위터에서 봤던 어떤 밈이 떠오른다. 항상 등을 떠밀기만 하고 한 번도 자랑스럽다고 말해준 적 없는 내 아시아인 엄마에 대한 자조적인 평가다.
마지막까지 잘했다는 말 없이, "그냥 이렇게 가는 거예요?"라는 딸의 말에 "그냥 이렇게 가는 거란다" 그리고 "한동안은 오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엄마. 전형적인 아시아인 어머니의 그 말이 이번에는 딸을 밀어 멀리 내보낸다. 실패와 성공을 가를 수 없는 곳으로 가라고, 처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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