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게 된 건 황금가지가 인용한 <릿허브>의 추천사 때문이었다. 

 

— “젠장, 세상이 끝나면 어쩌지”와 “젠장, 세상이 안 끝나면 어쩌지”의 중간에 살고 있다면 딱 맞는 작품.

 

나는 세상이 안 끝나면 어쩔지 고민하는 쪽이다. 지구온난화와 비인도적인 가축 사육에 대해서 고민할 때도 그렇지만 대체로는 내 삶에 대해서 고민할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이 이대로 계속 굴러간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은 대부분 나의 쓸모에 대한 생각으로 귀결된다. 내가 이렇게 계속 쓸모가 없다면, 이렇게 망망대해를 영원히 표류하는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면, 목표가 너무 많아서 헷갈리고 그 중에 아무 것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면, 도달해야 할 목표가 너무 멀어서 끝내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나는 왜 살아야 하지? 세상에 내가 필요하긴 한 건가? 이런 생각은 차라리 지금 당장 세상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엄청나게 화려한 불 쇼 같은 대규모 운석 충돌이나, 지구에 있는 모든 화산이 동시에 폭발하는 모습을 담은 드론 촬영 영상 같은 걸 상상하면 기분이 약간 나아지는 것 같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어떤 요인 때문에, 전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자연재해 때문에, 아무도 나에게 책임 소재를 묻지 않는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이 돌연 끝나버린다면, 그렇게 돌연한 상황, 아무 맥락 없는 상황, 아무도 상상해본 적 없는 상황에 나는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어떤 예상도 들어맞지 않으므로 더 이상 예상을 할 필요가 없고, 어떤 루틴도 따를 필요가 없고,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모두가 공평하고 평등하게 할 말을 잃은 상황에서 나는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강렬한 색의 표지가 눈을 잡아끈다. 분홍, 보라, 청남색의 창문들. 해질녘의 뉴욕 오피스텔을 연상시키는 직사각형의 큐브들.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 같기도 하다.

 

 

<<단절>>은 내가 상상한 것처럼 돌연한 방식으로 이전에 존재하던 세상을 끝낸다. 그러나 내가 상상한 것만큼 단숨에 세상의 숨이 끊어지지는 않는다. 세상은 한 권에 걸쳐 서서히 그 모습을 바꾼다. 선 열병이라고 불리는 포자 감염 질병이 뉴욕을 강타한다. 사람들은 천천히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유 서비스가 각자 다른 속도로 작동을 멈추고, 공공 서비스가 그 다음으로 끊어진다. 재택근무와 휴가는 해당 직원이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선 열병에 걸려 천천히 죽어간다는 뜻이다. 이런 세상에서 중국계 미국인이자 이민 2세대인 주인공 캔디스는 몇 남지 않은 선 열병에 감염되지 않은 생존자다. 소설은 캔디스가 캔디스를 포함하여 아홉 명으로 구성된 작고 폐쇄적인 생존자 집단에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하여, 캔디스의 과거와 현재를 조밀하게 엮어 낸다. 

 

캔디스는 뉴욕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생존자로, 밥이라는 통제적이고 지배욕이 강한 남자의 인도 하에 시카고에 있다는 복합 문화 시설로 가는 로드 트립에 합류한다. 이들은 움직이면서 마트나 복합 쇼핑몰이나 개인 주택을 털어 미래를 도모한다. 당장 사용할 물품뿐 아니라 미래에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품들까지 닥치는 대로 모으며 시카고를 향해 천천히 이동한다. 

 

<<단절>>은 지금까지 나온 중 가장 평화로운 좀비 소설이다. 선 열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언어를 잃고,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루틴을 반복해서 재현한다. 좀비처럼 다른 세계를 향해, 더 이상 자신들이 속해 있지 않은 인간들의 세계를 향해 쏟아지듯 달려나오는 대신,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들을 집 안에, 익숙한 장소에, 익숙한 시간에, 매일의 루틴에 가둔다. 식탁에 앉으면 몇십 번이고 저녁 식사를 차리고 먹고 치운다. 화장을 하고 직장에 나가고 아무 의미 없는 업무를 처리하고 상한 음료를 마신다. 그러다가 영양실조에 걸려 서서히 말라 죽어 간다. 그들은 다른 좀비들처럼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다. 떼를 지어서 몰려오지도 않고, 생존자들을 위협하지도 않는다. 다만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척한다. 자연스럽게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의 몸에 어떤 영양분도 공급하지 않지만, 무언가를 계속 공급하는 척한다. 이 새로운 유형의 좀비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외부로부터 단절되고, 세계는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된다. 

 

선 열병에 걸린 사람들이 유지하던 사회 인프라가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결이 끊어진 세계는 원시적인 소규모 공동체로 굴러간다. 돈이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 온갖 물건들이 가득한 마트나 상점을 습격하고, 필요한 물건과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까지 트렁크에 가득가득 욱여넣는 광경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소비자들에게 풍족함을 대리 체험하게 함으로써 순간적인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과잉 생산되어 쌓여 있다가 과잉 소비될 물건들은 이 소설 전반에 걸쳐 계속해서 등장하면서 서서히 독자의 숨통을 죄인다. 어디든 마음대로 총을 쏠 수 있고,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약탈해서 얻을 수 있으므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길거리에 무한히 널려 있는 셈이다. 어쩌면 현대 독자들이 가장 해방감을 느낄 그런 장면들은 반복되면서 당연한 것이 되는데, 그렇게 모아 놓은 물건들이 그보다 더 많은 물건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는 순간 초라하고 하찮아 보인다는 것이 슬프고 우습다.

 

재미있으면서도 섬뜩한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처음으로 출장을 간 캔디스가 “가짜 화폐 같은 외화를 써버리고 말겠다는 탐욕스러운 광기”라고 묘사하는 홍콩에서의 쇼핑이 그렇다. 아직 선 열병이 발병하기 전, 사람들이 습관의 노예가 되기 전, 자기가 하는 일이 적어도 무언가를 돌아가게 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있던 시절에, 캔디스는 홍콩 야시장을 걷다가 죽은 사람들을 위한 지전과 종이로 만든 물건들을 파는 가게를 발견한다. 캔디스는 부모님을 위해 지전을 구입하고, 룸메이트가 구독하는 온갖 잡지에서 아빠와 엄마를 위한 옷, 신발, 서재가 인쇄된 페이지 등을 찢어내 함께 태운다. 물건들은 처음에는 기본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점점 범위가 넓어진다. 캔디스가 부모님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계속해서 불어난다. 그래서 마침내 캔디스는 “아찔할 겅도로 많은 양에 놀라 말문이 막힌 엄마와 아빠가 그 산더미 같은 물건들을 샅샅이 파헤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평생 필요한 양보다도 많은, 영겁의 시간에서조차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은 양의 물건”을 상상한다. 살아 있는 사람이 의식적으로 가지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의 물건들. 그러나 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살며 그만큼의 물건들을 소비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상상할 때 필요할지도 모를 물건들의 양은 항상 실제로 필요한 물건의 양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약간 내 봤다. 선 열병으로 모든 게 무너져 사람들의 집을 약탈해 삶을 꾸리면서도 일상용 식탁보와 특별한 날에 쓰는 식탁보를 따로 챙기는 마음들. 그런 마음이 왠지 오래 남았다.

 

 

<<단절>>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단절된다. 처음 봤을 때는 제목이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인 단어여서, 두 음절짜리 단어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단절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쓰이고, 보통 상태가 심각할 때 쓰이고 — 단절된 관계와 단절된 전선과 단절된 통신은 서로 이어져 있는 아주 가느다랗고 너덜너덜한 선조차 없다는 의미고, 단절 이후에는 단절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 재고의 여지가 없을 때 쓰인다. 소설에서 모든 단절되는 것들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이다. 진짜와 가짜의 사이를 가르고, 과거와 현재의 사이를 가르고, 일상과 비일상 사이를 가르고, 거대한 크레바스처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단절된 두 상태 사이에는 항상 중간지점이 있다. 중간지점은 단절된 양쪽 중에 어느 쪽도 택하고 싶지 않을 때 들어갈 수 있는 대안적인 상태이면서 완전히 뒤틀려서 기형적으로 변한 상태다. 그리고 이 소설 전체가 그 중간지점이다. <<단절>>은 캔디스 첸의 성장 소설이기 때문에 소설의 처음과 끝 사이에 있는 모든 서사는 캔디스 첸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기 위한 중간지점이다. <<단절>>은 끊임없이 캔디스의 현재와 뉴욕에서의 과거 일상, 유년기, 캔디스의 부모님의 이야기를 오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뜨개질로 다리를 짜듯이 이전의 캔디스와 이후의 캔디스를 매개한다.

 

<<단절>>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캔디스의 배경과 현재다. 캔디스는 설정상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인물이지만 자신의 과거와 완전히 단절될 수 없는 인물이다. 이 모순점이 소설 내내 독자들을 미국, 캔디스 가족의 뿌리인 푸저우, 캔디스의 유년기를 보낸 곳인 솔트레이크시티, 캔디스가 동화되고자 했지만 영원히 동화될 수 없었던 뉴욕으로 동시에 잡아끈다. 캔디스는 뉴욕 시민이지만 동시에 관광객이다. 캔디스는 사진을 찍으러 뉴욕 곳곳을 다니면서 자신이 관광객으로 보이기를 바란다. 그건 캔디스의 외형, 아시아계의 얼굴과 신체 때문이다. 캔디스는  뉴욕에 완전히 동화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럴 바에는 외부인의 시선으로 뉴욕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캔디스에게는 고향이 없다. 태어난 곳은 여섯 살에 떠났고 부모는 캔디스가 대학을 마치기 전에 죽었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집은 타인에게 매각되었고 가족의 모든 소유물은 솔트레이크시티의 창고, “차디찬 상자 모양의 보관 시설”에 보관되어 있다. 캔디스에게는 자신의 뒤를 받쳐 줄, 뿌리가 어디인지 상기시켜 줄 가족이 단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캔디스는 미국의 어디를 가든 그곳의 관광객이며 외부자다. 

 

캔디스가 백인 소녀였다면 이야기는 다를 것이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더라도 캔디스가 겪었던 문화가 미국의 주류 문화인 한 캔디스는 어디에서든 자기 자리를 쉽게 찾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캔디스는 모두에게 익명의 공간인 뉴욕으로 피신하기를 택했다. 자신의 유년기 경험과 자신이 밟고 선 지형을 함께 엮어내지 못할 때 우리는 불안해지고, 그곳의 문화와 우리 자신이 단절된 느낌을 받는다. 캔디스는 뉴욕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살아 본 적 있는, 실제로 땅을 밟아 보기도 전에 대중의 상상을 통해 어느 정도는 살아본 적이 있는 유일한 도시”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뉴욕이 대중 매체를 통해 모두에게 익숙한 도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두에게 동일한 약속의 도시이며 모두에게 익명성을 보장하는 도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중매체를 통해 뉴욕을 보고 느껴본 사람들은 뉴욕에 거짓 향수를 갖게 되고, 뉴욕에서라면 자기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예측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그러나 그 기대마저 캔디스의 것은 아니었는데, 캔디스의 목적지는 구체적인 꿈이나 장소가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네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단다”라는 부모의 명제이기 때문이다. 캔디스는 무슨 일을 하든 근면하고 성실하게 임한다. 심지어 무직 상태일 때조차 매일 아침에 일어나 동일한 루틴을 따라 씻고 동일한 루틴을 따라 산책하고 사진을 찍는 일과를 주 5일 동안 꾸준히 반복한다. 그건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다는, 혹은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순응하겠다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래서 캔디스는 하룻밤을 보낸 상대들의 침대에서 아침나절을 뭉그적거리며 그 남자들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궁금해한다. 그들이 어떤 구체적인 상을 가지고 있고 그걸 얼마나 실현시켰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캔디스에게는 실상 선택권이 없다. 대학 시절 캔디스가 산업 지구들을 찍으러 다녔을 때, 그곳 술집의 남자는 미국에서 자란 캔디스에게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라고, “넌 여기 사람이 아니야. 넌 우리를 모르잖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캔디스 역시 자신이 포착하고 싶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작업을 중단했다고 말한다. 결국 캔디스는 하룻밤 만난 남자가 소개해 준 남자의 형이 하는 회사에서, 근면하고 꼼꼼하다고 평가 받는 중국계 미국인 사무직 노동자가 된다. 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 때는 “매주 금요일 밤” 뿐이고, 돈을 벌어서 “시세이도 얼굴 각질제거제와 블루보틀 커피와 유니클로 캐시미어 옷을 사는 사람”이 된다. 물론 캔디스 개인이 선택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캔디스가 미끄러져 들어간 삶이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흔히 요구되는 삶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남자친구 조너선이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첫 번째 장소”가 “네가 한 인간이 되는 최초의 장소이자 네가 네 자신이 되는 최초의 장소야”라고 말할 때 캔디스는 자신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고아로 사느라 그런 삶에 질려 버려”서 “두 발로 걷고 차를 몰며 무언가를 헤매는 삶 속에서는 결코 안정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너선이 말하는 가족은 전형적인 대도시 교외의 백인 미국인 가정을 의미한다. 조너선의 모든 가족은 한 장소에서 평생 동안 살았으며 조너선만이 가족을 벗어나 “혼자 살아가는 첫 번째 장소”를 만들었다. 그러나 캔디스의 모든 가족은 중국에 있는 가족들을 벗어나 이미 “혼자 살아가는 중” 이었다. 혼자 살아가는 부모와 함께 자란 캔디스는 가족과 문화와 동질감 속에서 살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조너선이 요트를 타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헤매는 동안 캔디스는 자기 자식에게는 뿌리 없는 삶이 아닌 다른 것, 제삼의 것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캔디스에게는 뒤로 돌아갈 수 있는 장소가 전혀 없다. 선 열병에 걸리거나 걸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고 말할 때 캔디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계속 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캔디스에게 돌아갈 가족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지만, 아시아계 미국인에게 요구되는 미덕이기도 하다. 근면하고, 쓸모 있고, 항상 자신의 쓸모를 타인에게 증명해야 하는 것. 그것이 캔디스의 부모가 캔디스에게 원한 것이었고 캔디스 자신이 원한 것이었으며 미국이 이민자에게 원하는 것이다. 캔디스는 일도 없고 관리자도 없는 상황에서도 꾸준하게 출퇴근 카드를 긁고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기까지 한다. 

 

소설이 던지는 의문은 이렇다. 선 열병에 걸린 사람과 캔디스는 대체 얼마나 다른가? 캔디스는 누구보다 선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살고 있는데 어째서 선 열병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것인가? 이런 의문은 소설의 중반쯤 가서 캔디스의 부모와 캔디스의 유년기, 부모의 삶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바뀐다. 캔디스는 왜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가? 이런 삶이 캔디스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캔디스는 갑옷처럼 자신을 두르고 있는 루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변한다. “캔디스의 삶은 얼마나 진짜인가?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느 만큼이 그저 “하는 척” 또는 “아닌 척” 하는 것인가? 그리고 “하는 척”과 “아닌 척”은 어디까지가 그저 “척”이고 어느 순간부터 진짜가 되는가?

 

소설은 진짜와 가짜 사이를 가르는 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단절, 이라는 말은 몹시 정확하고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소설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일은 스펙트럼 속에서 진짜 보라색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처럼 불분명하다. 캔디스의 첫 직장이자 유일한 직장의 이름이 스펙트라이고, 캔디스가 그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스펙트럼? 이라고 되물은 것은 상징적이다. 스펙트라에서 홍콩으로 출장을 갔을 때, 캔디스는 “진품과 모조품 사이에 그토록 정교한 차이가 존재하는 곳”이자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경계선이 그토록 허술해 보이는 곳”이라고 홍콩에 대해 평한다. 공교롭게도 이 모든 것은 홍콩에서의 명품 쇼핑에 국한된 말이지만,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홍콩은 거대한 중간 지점이다. 그리고 캔디스는 미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중간 지점이다. 캔디스는 홍콩에서는 중국과 남아시아에 외주를 맡기는 미국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뉴욕에서는 성실하고 근면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시아계 이민자의 역할을 기대받는다. 캔디스는 평생 양립 불가능한 두 상태의 사이에서, 명확하게 단절된 두 상태를 오가며 살아왔을 것이다. 캔디스의 아빠는 평생 동안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야근과 승진을 반복한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개인은 미국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캔디스의 가족이 고향 푸저우를 방문할 때마다 고향에 발붙일 자리가 없다는 사실은 점점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캔디스는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촌인 빙빙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오로지 빙빙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개설한 위챗 메신저에서는 각자의 언어를 구글 번역기에 돌려 상대방의 언어로 만들어낸 피상적인 소통과,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친밀함을 어필하려고 애쓰는 답답한 상태가 반복될 뿐이다. 문화와 문화 사이, 주류 백인들과 다른 피부색의 사이, “예술 소녀” 들과 성경 부서의 성실하고 허약한 중국계 미국인의 사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은 캔디스 가족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그리고 선 열병으로 인해 그 모든 경계가 무너져 내렸을 때 캔디스는 비로소 혼자 설 수 있게 된다. 캔디스를 규정하려고 했던 모든 제약이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제약의 껍데기가 깨졌다고 해서 캔디스가 마법소녀처럼 곧바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변신하지는 않는다. 소설은 캔디스가 루틴에 안주하는 집단의 일원으로 시작해서 홀로 설 수 있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캔디스는 이탈을, 다른 궤적의 삶을 꿈꾸고, 결국 그렇게 하게 된다. 캔디스는 처음에는 집단에서 소소하게 일탈하는 작은 무리에 끼어 “마리화나를 피우지는 않지만 차 안에 가득한 연기를 마시며 간접흡연을 하는” 정도의 일탈을 하지만, 마지막에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향해, 자신에게 처음으로 생긴 구체적인 목표와 구체적인 장소를 향해, 빼앗은 차를 몰고 달려나간다. 

 

의미심장한 것은, 평생 캔디스에게 미국에서 “더 나은 기회”를 잡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했던 캔디스의 엄마가 캔디스의 탈출을 돕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캔디스의 엄마는 캔디스의 꿈에 나타나, 살아 있을 때는 한 번도 구사하지 못했던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며 캔디스에게 도망치라고, 밖에 있는 진짜 삶을 찾아 떠나라고 종용한다. 캔디스의 무의식은 다정한 엄마를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다시금 자신의 등을 떠밀어주는 엄마, 루틴 바깥으로 나가 이제 드디어 진짜 삶을 살아보라고 말하는 엄마를 처음으로 만들어낸다. 

 

트위터에서 봤던 어떤 밈이 떠오른다. 항상 등을 떠밀기만 하고 한 번도 자랑스럽다고 말해준 적 없는 내 아시아인 엄마에 대한 자조적인 평가다. 

 

마지막까지 잘했다는 말 없이, "그냥 이렇게 가는 거예요?"라는 딸의 말에 "그냥 이렇게 가는 거란다" 그리고 "한동안은 오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엄마. 전형적인 아시아인 어머니의 그 말이 이번에는 딸을 밀어 멀리 내보낸다. 실패와 성공을 가를 수 없는 곳으로 가라고, 처음으로.

 

요즘 중국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중국, 대만, 홍콩 등이 좋고, 그 나라의 이야기를 읽고 싶고, 그 나라의 거리를 걷고 싶다. 집에서는 주로 중국 가정식을 해 먹고, 중국 시골에서 직접 채취한 재료로 요리를 해 먹는 유튜브 영상이나 미국인을 대상으로 영어로 하는 대만 요리 유튜브 계정들을 열심히 보고, 중국차를 마시고, 송나라와 당나라와 청나라에 대해서 조금씩 공부한다. 넷플릭스 "나의 추천" 탭에는 언젠가부터 중국, 대만, 홍콩의 영화와 드라마가 줄줄이 뜨고 있다.

 

<청두, 혼자에게 다정한 봄빛의 도시에서>를 읽어보려고, 왠지 이 책은 서점에서 집어들어야만 어울릴 것 같아 다음에 서점에 가면 사야지, 하는 사이 리디셀렉트에 이 책이 올라왔다. 그래서 우선 전자책으로 접하게 됐다.

이 책은 내내 이동하면서 읽었다. 버스를 타고 나갈 때마다, 버스카드를 찍고 자리를 잡고 앉으면 전자책 리더기를 꺼내서 이 책을 폈다. 나는 운동할 때 읽는 책과 쉬는 시간에 읽는 책과 잠자기 전에 읽는 책처럼, 용도를 나눠두고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곤 하는데, 이 책은 움직일 때 읽는 책이었다. 창밖으로 여름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버스에선 미묘하게 쾌적한 에어컨이 나오고, 스쳐가는 풍경 사이에는 가로수며 정원수의 신록이 책갈피처럼 끼어 있다. 그 사이에서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여름의 뜨거운 햇빛도 왠지 봄볕처럼 다정하게 느껴졌다.

 

이 책은 우선 다정한 책이다. 저자가 청두에서 한 달간 작은 아파트를 빌려 살면서 여행자로서 겪은 청두에 대해 말하는데, 항상 청두는 다정한 도시이고, 청두 사람들은 중국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도 다정했다고 말하곤 한다. 여러 번 반복되는 그 다정함이 책에도 묻어 있어서인지 저자의 말투도 다정하고, 사진의 색감까지도 다정했다(물론 전자책 리더기는 모든 사진을 흑백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이 부분은 휴대폰으로 보았다. 나중에 종이책을 꼭 사야겠다고 결심한 결정적 계기였다). 

 

청두의 음식, 청두의 볼거리와 청두 근교의 볼거리, 청두 사람들, 청두에서 마신 차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 뒤에 붙어 있는 여행 팁이며 들러보면 좋을 명소와 음식점들의 교통정보까지도 에세이의 한 부분처럼 잘 어울려 있다. 

 

이것은 여행서다. 그러나 이 여행서는 여행을 갈 때 들고 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행을 가기 전에, 그것도 일 년이나 오 년쯤 전에 읽어봐야 하는 여행서다. 이 책에서 여행자는 청두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고, 청두에서 글씨를 배우고, 소개받은 사람의 다실에 놀러 가 차 이야기를 잔뜩 하기도 하고, 차 시장과 차 산지에도 놀러 간다. 이런 경험은 숙련된 중국어 화자만이 가능한 것이어서, 그리고 한 달 이상 한 여행지에 장기 체류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어서, 여행을 가서 그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의 결을 반이라도 느끼려면 무엇보다 중국어부터 공부해야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은 언젠가, 를 기약하는 여행자를 위한 책이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어야지. 나도 언젠가는 저 곳에서, 단순히 며칠 머물며 관광지만 둘러보다 갈 외지인이 아닌 짧은 기간이지만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적극적인 여행자가 되어 살아보아야지, 그런 다짐을 하게 한다. 실제로, 저자가 소개하는 대부분의 청두 근교 여행 이야기며 청두 내에서 차 시장 등을 돌아다니는 이야기애는, 현지인과 대화하고 가이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이라는 중국어 실력이 전제되어 있다.

 

물론 이 책은 좋은 여행 에세이기 때문에, 여행을 가고 싶은 욕구와 중국어 공부를 하고 싶은 욕구보다는 여행의 즐거움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읽다 보면 내가 직접 그 자리에 가본 듯, 청두의 어느 시끄러운 밥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공원의 찻집에서 다탁 위로 나뭇잎이 한 잎, 사뿐히 내려앉는 걸 보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다. 한 달짜리 여행이어서일까, 여행 일정은 빡빡하지 않고, 하루를 몽땅 써서 다원을 방문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두보초당은 몇 번이나 방문하기도 하고, 일반적인 관광객이라면 가 보지 못할 곳을 방문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청두의 밤샘 영업 서점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시끄러운 거리의 한가운데, 마법처럼 조용한 서점이 나타나고, 점원까지도 접객보다는 책읽기에 골몰한 가운데, 여행자는 조용히 들어와 자동 판매기에서 차나 커피를 골라 마시고, 책을 골라 자리에 앉아 읽어나간다. 넓은 공간에는 저마다 책장을 넘기는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온다. 

 

서점을 좋아하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는 천국이 눈앞에 잠깐 펼쳐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내가 중국어를 전혀 못한다는 슬픔 속에서 그 천국은 내 눈물에 녹아 사그라지고 말았지만. 그렇게 밤샘 영업을 하는 서점들이 많고, 청두 사람들은 중국 전역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는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내 안에 중국어 공부의 욕구가 치솟으면서 단번에 청두가 나의 제1 중국 여행지로 등극했다. 청두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좋아하는 서점에서 차 한 잔과 함께(중국 최고 차의 산지라는 청두에서 자판기 커피 대용으로 차를 주문하면 대체 어떤 차를 내줄지 너무나 궁금하다) 재미있어 보이는 소설 한 권 정도는 편안하게 읽고 싶다. (물론 나는 중국보다는 대만을 더 좋아하고, 배우고 있는 것도 보통화가 아니라 번체를 쓰는 민난어이기 때문에... 그 서점에 번체 책도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전에 내 중국어가 독해 가능 레벨에 오르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언젠가, 를 기약하는 여행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현지 친구가 여럿 있고, 현지어로 막힘 없이 소통이 가능할 때, 또 현지 문화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가 있을 때, 그리하여 정말 "한 달 살기"를 위해서 현지에 갈 수 있을 때 여행자의 여행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를 이 책은 말한다. 아무 날, 정해진 일정이 없을 때 아무 것이나 하더라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여행. 그런 여행을 담은 책이다.

"그 순간, 기행이 가꿔온 믿음의 세계는 단숨에 무너졌고,

그 이후의 삶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따져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일곱 해의 마지막』, p.186

 

김연수라는 이름은 믿고 의지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했는데도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지는 작가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내면 중 어떤 부분만은 꼭 알고 있는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내게는 김연수가 그렇다. 김연수를 생각하면 김연수의 단편집에 실렸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은 커다란 나무를 중심에 두고 끝없이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재동과 가회동 사이에 있다는 그 커다란 나무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지만, 그 나무는 거대한 솔방울처럼 겹겹이 일어난 껍데기를 가진 나무일 것 같고, 그 나무의 둥치에는 사람이 손바닥을 댈 수 있을 정도의 타원형이, 까끌한 껍데기가 벗겨져 나가고 반질반질하고 단단한 속살이 거울처럼 드러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그 부분을 만지면 서늘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느낌이 손끝에 전해져 올 것 같고, 약간은 서러울 것도 같고, 뺨을 대보고 싶고 꼭 안아주고 싶을 것 같다. 김연수라는 이름, 김연수가 쓰는 글들은 내게 꼭 그런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항상 외로움과 고독에 대해서 쓰는 사람.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있을 때도 마음의 한 구석에는 사랑의 불기가 닿지 않는 차가운 구석이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을 만드는 사람. 김연수의 그런 인물들을 좋아한다. 항상 조금쯤은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그런 인물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 글에 등장하는 기행은 김연수의 그런 인물들을 끝까지 몰아붙여 만들어낸 인물 같았다. 백석, 흰돌 동무, 김연수의 글에 등장하는 기행은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을 이미 지나온 사람,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보낸 줄도 모르고 이미 보낸 사람, 지금 와서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기보다 그때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자꾸 되새기려는 사람이다. 우주선 이야기를 하며 아이들과 달을 보러 산을 오르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 앞의 눈을 치우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이제 말보다 침묵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소설 속에서 기행은 당으로부터 침묵을 강요받는다. 기행이 원하는 시는 모두 불온한 반동분자의 시로 낙인찍히고, 새로운 당의 문학 정책은 기행으로부터 흘러나오던 언어들을 앗아간다. 그러나 기행의 불행이 모두 해방 이후 수령 단일체제를 세우려고 하는 사회주의 북한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은 흘러나오던 수도꼭지를 비틀어 잠가버린 것뿐이다. 기행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행복을 즐기기보다는 예정된 불행에 대해 곱씹는 사람이었다. 저문 6월의 수선, 이라고 헌정시집 제목을 정해놓고도 첫눈에 반한 사람에게 직접 찾아가보지는 못하고 주춤하는 사람. 그래서 기행의 혼사를 추진하러 대신 통영에 갔던 친구와 기행이 마음에 둔 사람이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 그 이야기를 듣고 기행은 말한다. "그 순간, 기행이 가꿔온 믿음의 세계는 단숨에 무너졌고, 그 이후의 삶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따져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로도 기행의 삶에는 수많은 행복과 불행이 있었을 것인데, 그럼에도 그 한 번의 실패 후 그 이후의 삶은 그저 그 사건의 까닭을 따져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람. 그 단 한 번의 고통 속에서 평생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 그래서 그 사람 안에는 고통과 불합리함이 연이어 쌓여 갔을 것이다. 그 이후의 세월 속에도 "그 이후의 삶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따져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을"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을 테니까. 왜 자백위원회가 자백을 강요하는가. 왜 소련과 관련된 사람들을 숙청하는가. 왜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 취급을 받는가. 왜 그 강인하던 여학생이 자살을 했는가. 자신을 몰아붙이던 그 사람까지도 왜 지금 평양이 아닌 유배지에 있는가. 왜 아무것도 쓸 수 없는가. 왜 아직도 쓰고 싶은가.

 

불행과 불운만을 되새겨 곱씹는 사람, 시집을 내는 데는 돈이 얼마가 들어가도 개의치 않는 사람에게는 시를 쓰는 것만이 자신 안에 고인 것들을 흘려보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백석으로서의 시를 쓰지 않기 위해 겨울 밤 기온이 영하 삼십 도를 넘는 독골에 갇혀 있으면서, 기행은 옛 동무들에게 편지를 쓰고, 자신이 썼던 시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새로 써 보고, 새 시를 쓰고, 그 모든 것을 난로 안에 넣어 태워 버린다.

 

시를 시집으로 낼 수 없으나 그렇다고 시를 쓰지 않을 수도 없으니 시를 써서 태워버리는 마음. 그 마음은 백석의 시 「모닥불」에 나온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방을 데우고 따뜻한 물을 끓여 몸 속을 데우는 정도로나 소용이 되는, 종이를 태워 만든 불 앞에 앉아 기행은 불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 밤의 모닥불을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것. 자신을 꺾을 수 없으면 붓을 꺾으라고 하는 것. 그 안에서 붓을 꺾지 않기 위해 기행이 했던 선택은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선택지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과 동갑인 기행에게 아마도 일어나지 않았을 좋은 일들을 겪게 해주고 싶었다고 썼다. 예배당에서 흘러나오는 합창 소리와 어린 학생들의 동시 같은 것.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억을 주고 싶었다고 썼다.

 

하얗게 빛나는 차갑고 싸늘한 눈밭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억을 생각하는, 어린아이들의 시를 기다리는 기행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 아름답던 얼굴이 어떻게 늙어서 중년의 나이에 아바이라 불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나 그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을 것을, 그 미소가 서늘할 것을 또한 생각한다.

처음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책의 표지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예쁘다, 와 아름답다, 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예쁘다: (형) 1. (기본의미) [()] (대상의 색이나 모양이눈으로 보기에 좋고 사랑스럽다.

아름답다: (형) [()] (어떤 대상이즐거움과 기쁨을  만큼 예쁘고 곱다.

 

아름다운 것은 예쁘고 고운 것이고 예쁜 것은 좋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머릿속에 전자사전을 내장하고 있지도 않고 평소에 사전을 외고 다니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의 표지를 보며 느낀 감상이 예쁘다, 보다 아름답다, 였던 것은 아무래도 이 책의 표지가 차분하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무게감이 있으므로 러블리함보다는 고움 쪽에 좀 더 무게를 둔 단어 선택이었다. 

이 책을 읽은 건 이 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지만, 다분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우연함이 나를 이 책에게로 끌고 갔다. 막 이사한 집 주변을 걸어다니다가 서점을 겸하는 카페를 보았다. 무엇을 찾겠다는 마음도 없이 서가를 두리번거렸다. 새로 나온 책들을 주로 들여놓는 북카페 같았고 문학 섹션이 다양하지 않았는데 거기에 이 책이 있었다. 오톨도톨한 질감이 살아 있도록 초록색 천으로 마감한 하드커버 장정에 황동색 박으로 크기가 다른 여러개의 동그라미들이 겹쳐져 있었다.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른 조약돌들 같았다. 책을 펴보니 「파묘」가 나왔다. 그 단편을 황정은의 다른 소설집(『아무도 아닌』)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책은 이순일이라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다. 노인의 삶과 노인의 가족과 노인의 가족의 삶이 나온다. 노인은 전쟁통에 삼팔선 근처의 마을에서 살아남았다. 식구가 많은 친척집의 식모로 갔다가 시장 상인과 결혼해서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고 살았다. 아들은 뉴질랜드로 건너가서 졸업과 취직을 앞두고 있고, 이순일은 큰딸의 시가 재산으로 되어 있는 빌라에 살면서 큰딸의 집안일과 자신의 집안일을 돌보고 있고, 작은딸은 독립해 살면서 노인의 기준으로는 "너 하는 것도 살림이냐"는 삶을 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앞 문단에서 말한 그대로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앞 문단에서 말한 내용을 전부 알 수 없다.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기보다는, 삶을 살다가 한 번씩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조각들을 건져내서 이야기를 짓는 것 같다. 그냥 살다가, 살다가 한 번은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그러면 그 이야기를 하다가 너 누구 아냐, 이런 말도 하게 되고, 그러면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지는데, 그러다 보면 또 삼천포의 삼천포로 이야기가 흐른다. 그러다가 마지막은 결국 말줄임표로 끝난다.

 

한 번도 말줄임표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책에는 여러 번의 말줄임표가 있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기억은 뚝뚝 끊겨 있고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은 분명한 분절로 나타난다. 기억이란 게 원래 그렇다는 듯이. 삶이란 게 원래 그렇다는 듯이. 기억이란 자, 엄마, 이제 차분히 앉아서 엄마 이야기를 해봐. 뭐라고 말하든 다 들어줄게. 라고 한다고 해서 태어나 겪은 첫 순간의 기억부터 지금 딸과 마주앉아 있는 이 식탁의 기억까지를 줄줄이 시간 순서대로 읊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은 분명히 한다. 그렇게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은 오히려 소설의 행간에 있다. 이야기가 말하지 않는 부분에서 독자는 많은 것을 유추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도드라지는 것은 분절된 기억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에 관련된 것이다. 도드라진 어떤 기억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가짜 기억들을 갖게 되는지. 삶의 어떤 순간이 우리에게 남고 어떤 순간은 지워지는지. 한영진과 한세진과 한만수의 엄마 이순일은 학교에서 제대로 글을 배워본 적이 없고,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놓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남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기억뿐이다. 그런데 그 믿을 수 없는 기억이 이야기가 된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저 아무렇게나 섞어놓아도 한 사람의 일대기가 된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렇게나 섞어놓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좋은 삶인지를 고민할 겨를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이런 이야기를 오랜만에 읽는다는 생각을 했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건지, 남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현재의 고단함을 토로하지 않는 것. 그저 주어진 대로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드물고 귀하다. 삶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신 여기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 여기 이런 사람이 있다고, 있었다고, 지금도 어디엔가 섞여 살아가고 있다고, 계속 툭툭 끊기고 뒤섞이고 몇십 년 전이 지금 같고 지금이 몇 년 전인 것 같은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고. 삶이 어떤 건지 꼭 말해야 하냐고. 우리보다 한두 세대 위의 사람들만 하더라도 삶이 어떤 건지 말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가진 내러티브가 분명히 있다고.

 

표지 디자인이 이 책에 대해서 말해준다. 그 자리에서 책을 집어 후루룩 다 읽고는 책을 사서 나오면서 표지에 대해 생각했다. 고리처럼 이어져 있는 네 편의 이야기들에 대한 표지였다. 때로 서로의 내러티브에 깊숙이 스며들고, 때로는 점을 찍은 정도의 작은 접점밖에 남기지 않아도 분명히 서로 겹쳐 있는 이야기들. 표지 위에 그려진 원들은 책에 실린 이야기의 수보다 많다. 사슬처럼, 표지의 맨 오른쪽과 맨 왼쪽에는 반으로 잘린 조약돌들이 있다. 이 사슬은 끊어지지 않은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 표지의 바깥쪽, 표지의 뒤쪽까지도 쭉 이어질 것이다. 

 

순자씨들의 이야기가 그렇듯이. 순자라는 이름을 가졌거나 순자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우리의 어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태어나 자란 곳에서 수백 킬로미터를 떠나왔거나, 시장통에서 몇십 년 동안 시장통으로 출근하고 가게 위의 집에서 살고 잠드는 사람들이 모두 순자야, 순일아, 불리듯이. 모두의 집단적 기억과 개인의 특유한 기억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집의 내지에 황정은은 순자씨에게, 라고 적었다. 그 앞 페이지에는 작가의 서명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을 오래 바라보았다. 부디 건강하시기를, 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꾸 생각해보게 되었다. 늙어서도 무릎이 아프지 않고 두랄루민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반복되는 노동에, 오래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처럼 자꾸만 꼬이는 일상에 떠밀려 문득문득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모멸감이나 환멸이나 슬픔 때문에 마음이 눅눅하고 곰팡이가 슬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건강하다는 것은 몸을 말하는 것인가, 마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무튼 현재를 사는 일은 너무 고단하고, 그래서 나는 항상 나의 과거를 반추하고 나의 미래를 걱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그러니까 미래와 과거에 대해 걱정할 시간에 그냥 살라고 책은 말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일직선으로 정렬하고, 시간 순으로 늘어놓은 다음 그 이야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 시도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우리가 삶을 어떻게 끝이 닫힌 이야기로 만들고 우리가 "사는" 것을 방해하는지.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여기에서 지금을 살라고. 한 발짝을 바깥으로 떼어놓고,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어딘가로 가거나, 무슨 일을 하라고. 

그 메시지가 큰 위로가 되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같은 이야기들이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무엇이나 뜨거운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묘를 파내자 지열로 인해 구덩이 속에서 뜨거운 김이 오른다. 요리를 하면 뜨거운 기름이 튀고, 나물을 삶은 물을 버리느라 손가락 위로 뜨거운 물이 흐르고, 시장을 걷는데 햇빛이 뜨겁고, 손에 든 갓 튀겨낸 꽈배기가 뜨겁고, 이모를 만나러 간 날은 무척 더워서 눈을 한껏 찡그리고 상대를 확인해야 하고, 순대를 파는 아주머니는 퉁퉁 붓고 빨갛게 익은 손은 달걀을 쥐듯, 뜨거운 것을 억지로 만지듯 순대를 썬다. 그렇게 오랫동안 순대를 썰었는데도 그것이 뜨겁냐고, 자신을 기억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지 잘 알 수 없는 예전의 시장통 친구에게 순자씨는 묻고 싶지만, 그것을 묻는 대신 순대를 집어서 먹는다. 

 

이 책에서는 산다는 것이 다 그렇다는 것 같다. 정수리가 뜨겁게 햇빛을 받으며 빛 때문에 하얗게 보이는 길을 눈을 찡그리며 걷는 것. 그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그러나 돌아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편편이 떠오르는 것.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둔 채로, 그래도 삶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때로 일본 청춘 학원물에 등장하는 고등학생들은 현실의 고등학생들과는 몇백 광년쯤 떨어진 생물처럼 느껴진다. “에이, 이런 고등학생이 세상에 어디 있어?”라 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들은 에너지가 폭발하지도 않고, 욕을 남발하지도 않고,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세상에 적극적으로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림 처럼 정적이고, 성적인 에너지와도 멀어 보인다. 치열하고 초조하고 불안한 세계 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이 고등학생들의 이야기가 가진 매력이다. 아무리 급박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 청춘들의 태도는 마치 스크린 너머로 바라보는 계절 같다. 여름에는 덥고 매미가 운다. 공기가 늘어지 고 햇빛이 쨍하다. 겨울에는 뺨에 닿는 공기가 차갑고, 달이 밝고, 거리가 호젓하 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계절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부드럽고 평안한 태도를 취한다.

 

 

     『책과 열쇠의 계절』은 그렇게 넘겨 다보는 계절처럼 흘러가는 이야기다. 마쓰쿠라와 호리카와는 냉철한 판단력으로 마치 남의 일을 구경하듯 타인을 평하고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면, 미스터리한 세계에 떨어져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고 있다. 좋 아하는 선배의 반짝이는 입술을 바라보고, 자판기에서 팩 녹차를 뽑고, 도서실의 책을 정리하는 사이사이, 두 사람은 작은 사건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다가, 마침내 는 커다란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두 사람의 서사를 이끄는 손은 도망칠 수 없는 거대한 사건 앞으로 두 주인공을 이끌어 놓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결단도 행동도 남겨진 주인공들의 몫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것의 끝이면 서 시작이다. 계절은 평탄히 흐르고, 퍼즐을 맞추듯 사건은 순탄하게 풀린다. 그 안에서 끝까지 긴장을 유발하고 유지하는 것은 두 사람의 관계다. 이 소설은 서 로 앞을 바라보며 도서실의 카운터 안에 앉아 있던 두 고등학생의 일상의 궤도가 천천히 맞닿아 얽히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우연한 계기로 함께 행동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바깥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돌다가, 마침내는 서로 팔을 곁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호리카와는 “도서실 닫을 시간이 되기 전에 돌아와라”고 속엣말을 한다. 그 말은 이제까지처럼 담담해 보이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관계성을 내포한다. 이제 호리카와는 마쓰쿠라를 기다리고 있다. 마쓰쿠라가 “학 교에서 꺼낼 수 있는 이야기”의 작고 일상적인 세계로 돌아오기를, 마쓰쿠라의 궤도가 호리카와 자신과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는 대신 다시 함께 있게 되기를, 담담한 간절함과 부드러운 초조함을 담아 바란다. 『책과 열쇠의 계절』은 초여 름부터 초겨울까지, 두 계절을 함께 보내며 평온해 보이지만 미스터리로 가득한 세계를 천천히 유영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책과 열쇠의 계절』은 여섯 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된 청춘 일상 미스터리 다. 첫 단편 「913」에서 두 사람은 느긋한 초여름 낮에서 어둡고 비정한 음모의 세계로 느닷없이 굴러떨어진다. 마쓰쿠라는 내내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가 명탐정 다운 한 방을 먹여, 미인 선배의 무해하고 달콤한 웃음 속에 숨어 있는 음모를 잡아낸다.「록 온 로커」와「금요일에 그는 무엇을 했나?」를 거쳐, 마쓰쿠라는 날카로운 관찰력을, 호리카와는 마쓰쿠라가 놓친 관점을 짚어내는 명민함을 보이 며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콤비로 거듭난다. 그러나 여전 히 호리카와는 번쩍이는 미용실에 함께 가서 머리를 자르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함께 행동하여 재미있는 사건들을 구경하거나 풀어내지만, 친밀하게 일상을 공유 하는 것은 어려워하는 둘의 관계는, 「없는 책」과「옛날이야기를 해줘」를 거치 며 개인적인 관계로 발전한다. 호리카와는 마쓰쿠라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동 지침을 수정하고, 마쓰쿠라는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호리카와에게 털어놓는 다. 그래서 연작의 마지막, 「친구여, 알려 하지 마오」에 이르면, 호리카와는 자 신의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둘의 이야기는 시작된 줄도 모르게 시작되어, 있는 줄도 몰랐던 자리를 만들며 끝난다.

     허수경 시인의 작품을 좋아한다. 대학 도서관에서, 왠지 혼자 있을 때 집어들고만 싶어 서가 한 줄이 통째로 빌 때까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집었던 『혼자 가는 먼 집』에서, 강렬한 빨간색을 책상에 올려두자 책상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까지, 언제나 멀리 가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시를 읽다가 잠들면 가끔 꿈을 꾸었다. 햇빛이 가득한 풍경 속을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둑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논밭 사이로 걸어가는 사람이었다가, 햇빛 아래 널려 있는 흙집과 벽돌과 가시풀들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중동 지역을 비추는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친구들과 양꼬치를 먹을 때면 언어로만 본 풍경을 상상했다. 숯불 위로 기름을 흘리며 익어가는 양꼬치와 복숭아향이 나는 독한 중국 술을 앞에 두고 시인이 먹었다던 양고기 요리와 내 앞에 있는 꼬치에 꿰인 양고기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지 생각했다. 그 무렵에는 『길모퉁이의 중국 식당』을 읽고 있었다. 속이 허할 때 그 글을 한 꼭지씩 읽었다. 꼬치에 꿰인 양고기를 한 점씩 꼭꼭 씹어 먹는 기분이었다. 시인의 글에서 독일의 거리는 항상 텅 비어 있고 회색인 것만 같았고 발굴지에서는 햇빛과 해바라기가 잠든 개처럼 길에 널려 있는 것 같았다. 먼 이국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내 안에 있는 외로움을 꼭꼭 씹어 삼켰는데, 그럴 때마다 시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외롭고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그의 외로움과 아픔으로 내 외로움을 달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의 글은 중동의 햇빛처럼 쓸쓸하면서도 따뜻해서, 그 글에서 전해지는 이미지들로 그 시절을 견디곤 했다. 그럴 때마다 시인과 나 사이에 있는 거리에 대해 자꾸 생각했다. 독일의 대학 도서관과 한국의 대학 도서관의 거리, 발굴지와 서울의 거리, 국문과 대학생과 고고학 박사생의 거리, 내가 모르는 시인과, 내가 알게 된 시인의 글 속의 자아와의 거리에 대해 생각했다. 짧은 글들, 작은 조각들을 맞춰, 나에게서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을 안간힘을 쓰며 짐작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시인을 좋아했다.

 

사진 출처: yes24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를 읽으면서 다시금 거리에 대해 생각했다. 표지의 회색과, 표지에 박힌 발굴 현장 사진 속 색깔 사이의 거리. 딱 그만한 간극에 시인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멀리 있는 것에서 위안을 찾았다. 갈 수 없는 곳을 상상하고 닿을 수 없는 곳을 기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공간을 견뎠다. 시인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에 있으면서, 시인이 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하고 닿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시인은 그 거리에 대해서 말하고, 그 거리를 메울 수 없음에 대해서 말했다.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 말하고, 돌이킬 수 없는 기억에 대해서 말하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그 사이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시인은 고고학으로는 짐작만 할 수 있다고, 옛날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폐허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가 말하는 폐허는 부서진 콘크리트와 무너진 기반의 잔해가 아니다. 허수경이 말하는 폐허는 복구할 수 없는 거리 건너편에 있는 무너진 건물이 아니라, 복원할 수 있는 기억 저편에 세월의 더께로 덮인 흔적이다. 그 사실이 더할 수 없는 위안을 주었다. 그 폐허는 다시 세울 수 있는 기억이다. 시인은 글에서 절대로 우리는 그 폐허를 완전히 복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이 발굴하고 있는 폐허와 자신이 가진 먼 기억을 연결시킨다. 자신의 삶에서 존재했던 어느 한 시절의 개인적인 기억을 꺼내고, 그것을 발굴지와 연결해 전혀 다른 두 시간과 공간 사이를 잇는 것이 허수경이 이 글에서 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어질 수 없는 것은 이어지고, 복원될 수 없는 것은 다시금 새롭게 생명을 얻는다. 

 

     허수경은 발굴자로서 글에서 폐허 도시, 라는 말은ㄹ 자주 사용한다. 이 폐허 도시는 기억의 퇴적층으로서의 폐허, 햇빛 아래에서 빛나는 돌과 흙으로 된 폐허이다. 이 폐허에 가 닿기 위해서는 오래 쌓인 세월의 더께를 걷어내야 한다. 시인은 아마 몸으로 그 폐허가 들쓴 흙더께를 걷어내면서 마음 속의 지층을 뒤져 자신의 사적인 기억을 하나씩 건져올리는 작업을 함께 한 것인지 모른다. 

 

     이 글은 끊어진 적이 없어서 이어질 수도 없는 것들을 잇는 작업이다. 삶과 죽음이, 살아 있음과 퇴적되어 쌓여 있음이, 감각과 기억이 이어진다. 나는 내가 시인을 이해할 수 없음을, 시인의 속이 어떤지 결코 알 수 없음을 이 글을 통해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이 위안을 주는 것이다. 시인이 폐허를 발굴하며 자신의 기억으로 고대와 현재 사이를, 오리엔트와 동아시아 사이를, 고대문명과 현대문명 사이를 잇듯, 나도 그렇게 시인을 독해하는 것이 허락된 것 같아서.

 

     허수경의 글은 아주 정연한 문장으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때가 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시인의 육성이 들리는 것 같은 문장들을 발견하곤 한다. 제일로, 있으므로, 그래서, 같은, 문장속에 섞여 숨어 있으면 그냥 문어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구어로 들리기도 하는 단어들. 그런 것들을 찾으면서 천천히 꼭꼭 씹듯이 이 글을 읽었다.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라고, 전혀 개인적이지 않은 개인의 기록이라고 생각하면서.

 

 

 

『잘 자요 엄마』는 영원히 메울 수 없는 상실로 시작해서 영원히 벌충할 수 없는 상실로 끝난다. 이 상실을 한 단어로 줄이면 죽음이다. 죽음은 이야기를 열고 닫는 데 모두 함께한다. 소설은 하영의 외조부모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이병도와 이선경의 죽음으로 끝난다.소설의 시작에서 더 거슬러올라가면 이병도의 첫 살해와 하영의 첫 살해가 있다. 이 소설의 죽음은 단순히 세상에서 죽은 자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죽는 사람에게보다도 남겨지는 사람에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결국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가 밝혀지는 순간에도 이 소설의 사건은 해결되지 않고,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미스터리 장르에서 깔끔하게 서사를 완결하는 일은 유행이 지난 지 오래다. 셜록 홈즈나 애거사 크리스티 같은 고전 미스터리물에서 탐정은 히어로다. 때문에 모든 사건은 해결된다. 그러나 무언가를 새로 얻어서, 무언가를 완벽히 해결하고, 독자가 평온함과 충만감과 함께 책장을 덮게 하는 서사의 유효 기간은 이미 끝났다. 한 사건이 끝났다고 삶이 끝나지 않듯, 서사도 이야기의 끝에서 마무리되지 않아야 한다. 책장을 덮은 뒤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고, 어느 쪽으로도 가지를 뻗어나갈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뒷이야기를 스스로 만들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기는 것은 중요하다. 이야기의 끝에서 새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즐기는 독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역할과 위치가 다층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실과 맞닿으려면, “그리하여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라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사건 후에 남겨진 이들과 그들이 살아갈 세상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독자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키는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이러한 미스터리 장르의 최근 동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나폴리탄 괴담이다. 나폴리탄 괴담은 이야기는 있되 이야기의 끝은 없고, 독자의 상상력이 무한으로 뻗어갈 여지를 주는 동시에 현실 어딘가에 실제로 이런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머리끝이 쭈뼛하게 하는 효과도 노린다. 이런 관점에서 서미애의 『잘 자요 엄마』는 잘 만들어진 미스터리 소설이다. 열린 결말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현실에 접합시키고, 정보가 하나 둘 모이며 서서히 드러나는 반전은 이야기를 읽는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하며 흡입력을 뽐낸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특히 등장인물을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건 속에 던져놓고 그가 거기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그리는 장르소설에서 중요한 테마는 성장이다. 『잘 자요 엄마』도 성장서사로 읽을 수 있다. 성장은 주인공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선이나 관점, 생각의 변화를 의미한다. 사건을 통해 주인공이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핍진성을 잃는다. 일상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사건을 겪고도 예전 그대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끝은 매섭다. 이병도는 성장에 실패하고 죽음을 맞는다. 선경은 성장하는 순간 죽음을 맞는다. 선경은 죽어가는 중에서야 자신이 이병도에 대해 생각했던 것도, 하영에 대해 짐작했던 것도 모두 자신의 경험과 선입견에 비춘 속단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깨달음의 순간 선경은 잠에 빠진다. 그래서 미스터리는 영원해진다. 독자에게 남은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다. 하영은 어떤 어른으로 자라게 될까? 선경은 하영을 지켜주려고 했지만 선경의 방식으로는 하영을 지키지 못했다. 선경은 눈을 감으면서 하영의 미래를 이병도의 죽음과 겹쳐본다. 하지만 하영이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에 관한 실질적인 단서는 주지 않은 채로 소설은 끝난다. 독자는 얼마든지 하영을 다르게 읽을 수 있다. 하영의 잔혹함이나 재성의 무심함이 마음에 걸리는 독자라면 하영의 무자비한 미래를 상상할 것이다. 하영이 선경에게 매달리던 모습을 기억하며 애정을 갈구하는 하영을 안쓰럽게 여기는 독자라면 하영에게 더 나은 삶을 열어주기 위해 다른 사건이나 조력자를 상상할 것이다. 아직 성장하지 못한 어린 인물을 남겨둠으로써 이야기는 독자에게 여지를 준다.

 

서사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내며, 퍼즐을 맞추듯 세 이야기를 엮어간다. 표면적으로 서사는 선경이 하영과 이병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선경의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삽입된 이병도의 이야기와 하영의 이야기는 여지없이 선경의 이해를 박살낸다. 선경의 이해에는 진실보다 오해가 더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선경에게보다 먼저 독자에게 알려진다. 이런 방식으로 소설은 독자에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세 사람의 이야기 사이에 균형을 맞춘다. 선경이 이병도와 하영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선경과 하영, 선경과 이병도 사이에 나타나는 표면적인 권력 관계를 전복한다. 선경의 이야기가 실제적인 사건을 먼저 설명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경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반면 선경의 이야기 앞뒤로 따라오는 이병도의 이야기는 선경이 퍼즐을 맞춰 주기 전까지는 파편적이고 동화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병도의 이야기는 선경에게보다 독자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 또 선경의 이야기 뒤에 이어지는 하영의 이야기는 선경의 선택들이 독단적이어서 결론적으로는 하영을 더욱 틀어박히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사 전개는 전통적인 물음들을 파기하면서 소설을 현대적으로 만든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누가 사건을 해결할 것인가?’. 소설은 어떤 인물에게도 삶에 대한 답을 주거나, 문제를 풀 수 있는 히어로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겨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을 허락할 뿐이다. 소설은 그 최선이 상황을 더욱 몰아붙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행동들을 제시한다. 그 행동들이 서로를 더욱 어긋나게 만들더라도, 하영과 이병도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그러므로 최고의 방어는 결국 교도소 소장이 말하는 “저런 놈과 엮여 봐야 뭐가 좋다고…” 일지 모른다. 그러나 최고의 방어는 최선이 아니라 무심이거나 무시일 뿐이다.

 

이 소설은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존재하는 맹점에 대한 이야기다. 선경은 “퍼즐을 맞추듯” 이병도와 윤하영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며, 자신의 경험과 교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심지어 선경은 범죄심리학을 전공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이 이병도와 하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을 부린다. 선경은 계속해서 자신의 이해를 수정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영과 이병도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다. 선경은 하영과 “정말 잘 지내고 싶었지만” 선경이 하영을 위해 한 선택들은 모두 틀렸고, 선경은 희주가 “심리학 전공했다는 애가 그런 소리가 나오니?”라고 말해서야 자신이 하영에게 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아니라 일방적인 떠안기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역설적이게도 이 이해의 불가능이 소설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만든다. 세 가지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되게 하며, 모두의 이야기를 공평하게 다루게 하며, 모든 이야기를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 속으로 이끈다.

커스터머가 된다는 것은

 

이 책의 표지에는 화려한 색깔의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책을 집어들기 전에 먼저, 녹색과 금색과 주홍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열대어의 지느러미가 눈에 띄었다. 열대어는 아름답고 징그럽고 신비로워 보인다. 발레리나의 치맛자락처럼 풍성한 꼬리지느러미는 하늘하늘하고 아름답지만, 비늘이 그대로 드러난 물고기의 등이나 사실적으로 그려진 지느러미 연결부를 보면 첫눈에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생소하고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냥 아름답지 않고 사실적인 물고기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지만 본능적인 거부감도 느껴지는 표지 그림이 강렬한 색채로 눈을 사로잡았다.

 

『커스터머』를 다 읽고 나서 표지 안쪽 책날개를 살펴보니, Visarute Angkatavanich의 그림을 가공한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 책의 세계와 퍼즐 조각처럼 꼭 맞는 표지다. 『커스터머』는 이종산이 만든, 아름답고 다채롭고 끔찍한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커스텀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체를 가공할 수 있다. 색깔을 바꾸거나 특정한 냄새를 풍기는 것에서부터, 머리에 오리를 심거나 날개를 다는 것까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 커스텀은 사람들을 몸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미의 기준을 새로 만들어 준다. 

 

"왜 자기 몸을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지?

왜 몸을 괴상하게 바꾼 거야? 커스텀은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거잖아!"

 

라고 비명을 지르던 수니는 다시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자기 팔을 호스로 바꾼 그 남자가 아름다웠다는 걸. 사진 속의 그 남자가 행복하게 웃고 있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다." (『커스터머』, 25)

 

그러나 커스텀이 세계를 구원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다. 재해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간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도, 세계 공용어가 있고 커스텀을 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언제든 재정의할 수 있는 세상에서도 커스텀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부자들은 집을 세 채씩 가지고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미세먼지로 고생을 한다. 혐오와 차별은 여전히 공고하고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우고 막 고등학생이 된 수니는 이 모든 징그럽고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맛있어 보이는 것이 많았다. 한참을 가게 쇼윈도 앞에서 서성였는데 결국은 스테이크가 들어간 도시락을 샀다. 내가 도시락을 고르는 동안 엄마는 옆에서 그냥 기다려주었다.

엄마는 내가 뭔가를 결정해야 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충분히 시간을 줬다. 난 엄마의 그런 점을 존경했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 때까지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커스터머』, 33)

 

원하는 게 뭔지 알 때까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이 소설에서 350페이지에 걸쳐 수니가 하는 일이다. 수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커스텀이 뭔지 알아가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자신이 그 아이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간다. 그래서 수니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하나가 투쟁이고 쟁취다. 모든 사람들의 성장이 그렇듯이 꼭 그렇다. 수니의 뜻은 자주 좌절되고, 수니가 좋아하는 아이는 누명을 쓰고, 수니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지역적 특징은 수니를 약자로 만들어 표적이 되게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종산의 문장은 담담하고 꾸밈이 없다.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지극히 리얼하다. 수니의 눈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차별과 적의를 예민하게 읽어낸다.

 

"바로 다음날부터 라울이 나에게 들러붙었다. 다른 애들도 있었다. 반스, 카를로, 헤차스, 울베. 모두 라울의 친구였다. 파리들.

왜 안이 아니라 내가 표적이 됐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이해했다. 라울이 수치를 느끼던 그때 내가 그애의 눈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순간에 눈이 마주친 것은 나에게나 라울에게나 재수없는 일이었다." (『커스터머』, 184)

 

 

세계는 아름답지 않다. 들키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우연히 보았다는 이유로 표적이 되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한다. 그 속에서 수니는 가끔은 무력하고, 가끔은 두근거리며,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그 보상처럼 달콤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서 태풍 같은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고, 그 사건을 극복하고 진실을 밝혀내고 사랑을 쟁취하기도 한다. 이 세계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것, 그리고 커스텀으로 몸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은 얼핏 중요하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소녀가 성장하는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소녀는 성장하고, 일어서고, 나아간다. 어떤 세계에서든지. 누구나 그렇듯이. 두려움을 안고서도 멈추지 않는다. 

 

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해도, 전 지구적인 재해가 일어나 모든 것을 덮치고 사라졌다고 해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바꿔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고 해도, 차별과 혐오는 팽배한다. 바꿀 수 있는 손톱 색깔의 수만큼, 몸에 달 수 있는 온갖 파츠들의 수만큼 화려한 색과 물건과 맛으로 가득 찬 세계라고 하더라도, 세계는 세계이고 성장은 성장이며 한 소녀가 성장하는 과정은 아프고 뜨겁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원하는 것은 매일 바뀌고, 친구들에게서 소외되기도 하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기도 하고, 그 모든 일들을 거치고 나서 비로소 날개를 달기도 한다. 행운만큼 불행하고 행복한 만큼 불안정하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수니는 자신을 묶어뒀던 것들로부터 하나하나 해방되어간다. 그 과정을 함께 겪어가면서,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돌파구를 향해 달리는 게 아니라 돌탑을 쌓아올리듯 하나하나 주변을 바꾸어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떻게 커스텀되더라도 세상은 불완전하고, 사람은 불안정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매일이 모험이다. 커스터머가 된다는 것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매일매일 스스로를 커스텀하고 있다. 모두가 모두로부터 달라지고 있다. 모두가 다르기를 갈망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살아가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 모습은 끔찍하고 리얼하고 다채롭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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