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터머가 된다는 것은
이 책의 표지에는 화려한 색깔의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책을 집어들기 전에 먼저, 녹색과 금색과 주홍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열대어의 지느러미가 눈에 띄었다. 열대어는 아름답고 징그럽고 신비로워 보인다. 발레리나의 치맛자락처럼 풍성한 꼬리지느러미는 하늘하늘하고 아름답지만, 비늘이 그대로 드러난 물고기의 등이나 사실적으로 그려진 지느러미 연결부를 보면 첫눈에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생소하고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냥 아름답지 않고 사실적인 물고기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지만 본능적인 거부감도 느껴지는 표지 그림이 강렬한 색채로 눈을 사로잡았다.
『커스터머』를 다 읽고 나서 표지 안쪽 책날개를 살펴보니, Visarute Angkatavanich의 그림을 가공한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이 책의 세계와 퍼즐 조각처럼 꼭 맞는 표지다. 『커스터머』는 이종산이 만든, 아름답고 다채롭고 끔찍한 세계다. 이 세계에서는 커스텀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신체를 가공할 수 있다. 색깔을 바꾸거나 특정한 냄새를 풍기는 것에서부터, 머리에 오리를 심거나 날개를 다는 것까지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다. 커스텀은 사람들을 몸의 구속에서 해방시키고, 미의 기준을 새로 만들어 준다.
"왜 자기 몸을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지?
왜 몸을 괴상하게 바꾼 거야? 커스텀은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거잖아!"
라고 비명을 지르던 수니는 다시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자기 팔을 호스로 바꾼 그 남자가 아름다웠다는 걸. 사진 속의 그 남자가 행복하게 웃고 있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다." (『커스터머』, 25)
그러나 커스텀이 세계를 구원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다. 재해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간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도, 세계 공용어가 있고 커스텀을 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언제든 재정의할 수 있는 세상에서도 커스텀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고 부자들은 집을 세 채씩 가지고 낙후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미세먼지로 고생을 한다. 혐오와 차별은 여전히 공고하고 사람들은 편을 갈라 싸우고 막 고등학생이 된 수니는 이 모든 징그럽고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맛있어 보이는 것이 많았다. 한참을 가게 쇼윈도 앞에서 서성였는데 결국은 스테이크가 들어간 도시락을 샀다. 내가 도시락을 고르는 동안 엄마는 옆에서 그냥 기다려주었다.
엄마는 내가 뭔가를 결정해야 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충분히 시간을 줬다. 난 엄마의 그런 점을 존경했다.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 때까지 내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고." (『커스터머』, 33)
원하는 게 뭔지 알 때까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이 소설에서 350페이지에 걸쳐 수니가 하는 일이다. 수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커스텀이 뭔지 알아가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자신이 그 아이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간다. 그래서 수니가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하나가 투쟁이고 쟁취다. 모든 사람들의 성장이 그렇듯이 꼭 그렇다. 수니의 뜻은 자주 좌절되고, 수니가 좋아하는 아이는 누명을 쓰고, 수니가 가지고 있는 신체적, 지역적 특징은 수니를 약자로 만들어 표적이 되게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종산의 문장은 담담하고 꾸밈이 없다. 이 소설에서 묘사하는 세계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지극히 리얼하다. 수니의 눈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차별과 적의를 예민하게 읽어낸다.
"바로 다음날부터 라울이 나에게 들러붙었다. 다른 애들도 있었다. 반스, 카를로, 헤차스, 울베. 모두 라울의 친구였다. 파리들.
왜 안이 아니라 내가 표적이 됐는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이해했다. 라울이 수치를 느끼던 그때 내가 그애의 눈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순간에 눈이 마주친 것은 나에게나 라울에게나 재수없는 일이었다." (『커스터머』, 184)
세계는 아름답지 않다. 들키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우연히 보았다는 이유로 표적이 되고,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격을 당한다. 그 속에서 수니는 가끔은 무력하고, 가끔은 두근거리며,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그 보상처럼 달콤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서 태풍 같은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고, 그 사건을 극복하고 진실을 밝혀내고 사랑을 쟁취하기도 한다. 이 세계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것, 그리고 커스텀으로 몸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은 얼핏 중요하지 않게 보이기도 한다. 소녀가 성장하는 이야기는 어디에나 있으니까. 소녀는 성장하고, 일어서고, 나아간다. 어떤 세계에서든지. 누구나 그렇듯이. 두려움을 안고서도 멈추지 않는다.
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했다고 해도, 전 지구적인 재해가 일어나 모든 것을 덮치고 사라졌다고 해도, 자기 몸을 마음대로 바꿔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고 해도, 차별과 혐오는 팽배한다. 바꿀 수 있는 손톱 색깔의 수만큼, 몸에 달 수 있는 온갖 파츠들의 수만큼 화려한 색과 물건과 맛으로 가득 찬 세계라고 하더라도, 세계는 세계이고 성장은 성장이며 한 소녀가 성장하는 과정은 아프고 뜨겁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원하는 것은 매일 바뀌고, 친구들에게서 소외되기도 하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기도 하고, 그 모든 일들을 거치고 나서 비로소 날개를 달기도 한다. 행운만큼 불행하고 행복한 만큼 불안정하다.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며, 수니는 자신을 묶어뒀던 것들로부터 하나하나 해방되어간다. 그 과정을 함께 겪어가면서,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의 돌파구를 향해 달리는 게 아니라 돌탑을 쌓아올리듯 하나하나 주변을 바꾸어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어떻게 커스텀되더라도 세상은 불완전하고, 사람은 불안정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매일이 모험이다. 커스터머가 된다는 것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매일매일 스스로를 커스텀하고 있다. 모두가 모두로부터 달라지고 있다. 모두가 다르기를 갈망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살아가기를 갈망하고 있다. 그 모습은 끔찍하고 리얼하고 다채롭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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