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종류의 흑마술이라도 있으면 분명 시도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사람들이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신기하고, 이 세계가 두렵다.
나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내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벼락을 맞고 싶다거나 사라져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을 때 내 정신과 주치의는 그런 수동적인 생각은 유아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로는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조금이라도 수동태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선택과 책임이라는 말의 무게를 내가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같지 않다라는 말은 하나의 기분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같지 않은 것을 해낼 것이고 무언가를 잊거나 묻어둘 것이다. 때로 죽고 싶을 것이다. 종종, 자주, 가끔, 언젠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충동과 싸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삶이 이어진다는 것은, 다만 비단 한 필을 도르르 풀어버리듯 삶이 그저 이어진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삶이 멈추는 일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소설 속의 인물이라뇨. 그런 것이... 되고 싶겠습니까, 라고 황정은 작가는 말했다. 그러나 나는 소설 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 그 세계에는 인과와 상관이 있고, 인과와 상관의 개수만큼 우연과 기회와 비틀림과 마주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 삶은 끝없이 이어진 길이 아니라, 양 끝이 이어진 뫼비우스의 띠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이 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갈등과 고통도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끝이 난다는 것이 명백한 세계가, 반드시 나의 상태나 위치가 변할 것이라는 것이 기본 명제로 깔려 있는 세계가... 어떻게 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나는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야만 하고 나의 사유가 명료한 문장이 되는 세계에 살 수 있다면, 나는 현실 따위는 기꺼이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오지 않는 나타샤를 기다리며 보이지 않는 흰 당나귀를 생각하며 눈이 펑펑 나려 쌓이는 산길을 혼자서 걷는 일이라 해도, 다만 발이 얼고 마음이 어는 길을 끝없이 걸어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어떻게 나를 현실에 잡아둘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불확실과 불합리와 몰이해와 납득 불가능함 속에?
나는 다만 가능성의 세계로 가고 싶은 것입니다.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러시아 민담에서는 용사가 길을 가다가 이즈바를 만납니다. 이즈바는 작은 오두막으로, 그 안에는 바바 야가가 살고 있습니다. 바바 야가는 절구를 타고 날아다니는 할머니 요괴로, 용사에게 도움을 줍니다. 용사가 부르면, 뒤돌아 있던 이즈바가 용사를 향하여 앞문을 돌립니다. 그러면 용사는 이즈바로 들어갑니다. 이즈바는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용사가 이즈바로 들어가는 것은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모험과 이야기의 세계로, 금은보화와 공주의 세계로, 시련과 보상의 세계로......
때로 용사가 모험을 끝내고 돌아오면 현실의 갈등이 손쉽게 해결되어 있고는 합니다. 용사를 괴롭히던 왕이 죽습니다. 사악한 왕비가 죽습니다. 용사의 형제들이 용사에게 잘못을 빕니다.
다만 이것을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