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단 한 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미 써 버린 것일까? 칫솔을 물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생각했다. 생에도 한 번쯤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있으면 좋겠다. 기계로 만든 신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내려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모든 꼬인 사건과 얽힌 관계들을 단 한 마디로 - "이제 내가 말하노니 너희는 평생 유복하고 평화로우리라" - 정리해주고 알렉산더 왕이 자른 매듭처럼 모든 것이 매끈한 단면으로 수렴하는 순간, 그리하여 모두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문장이 아주 짧은 순간에라도 참이 되는 순간이 존재하면 좋겠다.

 

흔히 인생을 무대로, 인간을 배우로 비유하곤 하지만, 그 비유는 틀렸다. 인생에는 스토리가 없다. 가끔은 내러티브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명확한 상관, 명백한 인과, 가끔은 수미상관 같은 것이 존재하면 좋겠다. 아니, 상관과 인과는 이미 삶에 넘치도록 존재한다. 그렇다면 상관이나 인과를 바라는 마음의 이면은, 상관이나 인과와 관계없이 꼬인 매듭을 풀어 줄 절대자를 바라는 마음이다. 운명 같은 우연. 아무런 인과도 없고 상관도 없는 사건이 끼어들어, 이전의 모든 갈등을 무로 돌려버리고 다시 등장인물들을 단결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삶에 단 한 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주어져 있다면, 그러면 지금 고민하는 나는 그 기회를 이미 전에 써 버렸을까? 아니면 아직 손에 쥐고 적절한 기회를, 지금보다 더 괴로울 때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꼬여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상상의 사건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마 이미 써버렸기가 쉬울 것이다. 죽을 만큼 괴로웠던 순간은 지금이 아니어도 있었고, 그 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위해 기회를 남겨줄 만큼 자비롭거나 생각이 길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만큼 괴로웠을 것이고, 이 시기를 잘 넘길 수 있다면 다시는 이런 괴로운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더 지혜롭게 살겠다고, 더 깊이 생각을 하고 움직이겠다고 굳게 맹세했을 것이다. 신에게 기도하는 마음이 늘 그렇듯.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다시는 같은 일을 만들지 않을게요. 다시는 이렇게 함부로 살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딱 한번만요.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 번만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간절함이 배가된다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인과도 없는데도. 미래의 일을 저당 잡아서 현재를 해결하고 싶어한다. 이제 더는 없을 테니까, 라고 말한다. 이제 더는 없으면, 단 한 번이면, 그러면 신이 개입하는 일이 더 쉬워지나?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아마 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이 있기가 쉽다. 혹은 인간이 반드시 실수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생각이, 인간이 지혜롭고 효율적으로 사고한다는 생각이, 그러니까 두 번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리고 그 생각은 신의 능력치를 한계 짓는 생각이다. 신에게도 문제 해결 능력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그러니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단 한 번이면 도와줄 만 하다는 생각.

 

빨간 머리 앤의 딸인 낸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가구 위만 밟고 다니면서 바닥을 밟지 않으면, 그러면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세요. 앤이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신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감싸안아주는 분이야. 신은 조건부로 사랑이나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

 

신이 있을까? 그렇다면 기적도, 타임 슬립도, 모든 것을 무로 돌리거나 새로 시작하는 손길도, 모든 갈등을 눈녹듯 풀어 버리는 힘도 있을까?

 

모두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무도 상처입히지 않고, 아무도 상처입지 않고, 모두가 그냥 그대로 살더라도 모든 것이 영원하고 행복하리라는 상상. 누구와도 멀어지지 않고,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양손에 사탕을 가득 쥐고서 사탕 단지 밖으로 손을 뺄 수 있으리라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에 대한 꺾이지 않는 기대. 놓을 수 없는 희망.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지혜롭다는 명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해왔다. 아빠는 나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그만큼이나 책을 많이 읽었으면 남들보다 지혜로워야 하지 않니? 방황을 그만해야 하지 않니?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어야 하지 않니?

책은 아무 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내가 서양 고전을 섭렵하는 대신 판타지 소설을 읽었기 때문에도, 비문학 작품을 충분히 많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도 아니다. 책은 아는 만큼 읽을 수 있고 경험한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은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최선의 답을 내주는 선택지 같은 게 아니다. 연극 <히스토리보이즈>에서 헥터는 시는 예방 주사라고 말한다. 문학은 예방 주사를 준다. 그건 선택의 순간에 가장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준다는 얘기가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 찾아왔을 때,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허무를 받아들여야만 할 때, 내가 신이 아니고 신은 절대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 절망과 고통을 문학이 이미 나에게 주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실제로 그 아득한 절망과 끝이 없는 고통을 마주했을 때, 이미 한 번 겪어본 사람의 자세로 그 감정의 폭풍우에 대항할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다.

 

최은영의 책을 여러번 다시 읽는다. 최은영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떠남과 남겨짐에 관한 이야기, 어떻게 할 수 없이 부서진 채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정말 소중한 것도 부서질 수 있다고, 정말 아낀다고 해서 끝까지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고, 그 이야기들은 말한다. 자꾸만 관계가 부서지고, 사람이 떠나고, 사람이 사라지고, 연락이 닿을 수 없게 되고, 한순간이 그 다음의 영원을 결정한다.

 

그러니까 모두가 그렇게 산다. 끊어진 것을 매끈하게 잇고 부서진 것을 깔끔하게 수리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다.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것은 아니며, 나의 선택은 오롯이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며, 나는 이미 선택을 했고, 그 선택으로 인하여 발생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부서진 것과 끊어진 것과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을 두고, 거기에 그냥 존재하도록 계속 두고, 시간의 더께가 쌓여 잊혀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어느 시점 이후로는 계속해서 실을 풀기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의 끝을 쥐고, 그 끝이 다른 끝에 닿도록 완벽하게 이어서 작품을 하나 만들고, 그 작품을 그 자리에 놓아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런 시간들은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남은 것은 끝이 풀린 실뭉치들이다. 잘리고, 끊기고, 내 앞에서 사라지고, 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가서, 뿌연 안개에 싸여 버린 실뭉치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 실뭉치에 깔려 죽기 직전에, 내가 만드는 작품의 한 귀퉁이가 완성된다. 내 작품은 진공에, 빈 공간에, 전시를 위해 놓아둔 공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셀 수도 없는 끝이 풀린 실뭉치들 사이에, 어지러운 난장판 속에 놓여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이 놓여 있는, 작품이 차지한 그 공간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일뿐. 실뭉치들이 작품에 개입하지 않도록 지키는 일뿐. 두 가지가 만나지 않도록 두 눈을 크게 뜨고 모든 순간에, 이미 있는 단 하나의 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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