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남산예술센터 시즌작: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리뷰


*****이 리뷰는 2017년 하반기 남산예술센터 리뷰단으로서 공연을 관람하고 작성되었습니다.*****


*****이어지는 글은 연극의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신 곁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1. 소녀

서로 다른 기억과 교차되는 언어: 죽음은 현재형이다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반바지에 나시티. 왜 그랬어요? 언니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2002년, 온 나라가 붉은 악마의 함성과 열기로 뜨거웠던 여름, 고등학생 김혜언은 죽었다. 흉기로 두부를 맞고 학교 잔디밭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무대 위에 나선 이들에게 김혜언은 여전히 존재하는 기억이다. 동창에게는 도저히 잊기 어려울 정도로 예쁜 아이였기 때문에, 어떤 이는 미제로 남은 사건의 목격자였기 때문에, 어떤 이는 용의자였기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덮어도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기에, 가족에게는 가족이기 때문에.

무대 위에 전시되는 것은 김혜언이라는, 자의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 같은 한 인간에 관한 여러 개의 기억이다.
연극은 산 이들의 증언으로 이뤄진다. 과거를 불러오는 말들과 현재를 표현하는 말들 사이에서 표출될 길 없는 감정은 난데없는 비틀기 춤으로 발산된다. 김혜언의 존재를 기억하는 말들, 김혜언이 죽은 뒤의 각자의 삶을 서술하는 말들, 김혜언이 없는 현재를 표현하는 말들이 이어진다. 무대 위에 존재하지 않는 김혜언은 언어로 이뤄진 기념비 같은 존재다. 정어리 떼가 대형을 바꾸듯, 서술하는 이가 달라질 때마다 김혜언은 형태를 바꾼다. 말들은 겹쳐지지만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한 무대 위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각자의 입으로 김혜언을 방백한다. 피카소의 그림이 그려진다. 관객은 각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짜맞추며 퍼즐 맞추듯 김혜언을 맞추려 노력한다. 무대 위의 인물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김혜언에 관한 이미지와 경험을 완고하게 지킨다. 인물들의 말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김혜언은 살아 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요구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죽은 후에도 스스로에 대한 단서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김혜언에 관한 것은 모두 이미지뿐이다. 김혜언의 생각과 김혜언의 말은 드러나지 않는다. 김혜언은 "브래지어는 물론이고 팬티도 입지 않은 채 학교에 가는" "원피스형 잠옷을 입고 무릎을 벌린 채 인형처럼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 감출 것이 없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의 몸은 타인에 의해 챙김을 받고, 타인에 의해 살해되고, 타인에 의해 재구성된다. 우리는 김혜언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관객이 알 수 있는 것은 김혜언의 몸에 대한 타인들의 시선뿐이다.

김혜언은 사건이고, 죽음이고, 그림자다. 이 연극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어떤 식으로든 김혜언과 관련되어 있다. 김혜언의 죽음 후 15년, 김혜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무대에 모인다. 이 연극의 주인공인 김다언은 김혜언의 동생으로 태어난 이래 김혜언으로부터 단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다. 자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형이자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김혜언이 어떻게 어떤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가. 자신의 뜻을 말한 적도 행동으로 내보인 적도 없기에 김혜언의 모든 순간은 오로지 타인의 시선과 경험에 의해 재단된다. 김혜언의 삶은 타인들의 오해로 이루어졌고, 김혜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몇 겹의 오해들 속에 감춰졌으며, 김혜언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려는 유형有形적 시도는 모두 실패한다. 언어로 김혜언을 쌓아올리는 것은 언제나 힘겨운 일이며, 자신과 어머니의 상처를 치유하는지, 오히려 소금을 뿌리는지 불분명한 김다언의 성형은 "그래서 좀 괜찮아졌니?"라는 상희의 말에 "뭐가 괜찮아질 수 있어요?"라고 반문하는 효과만을 낳는다. 김다언은 어떤 포즈pose를 통해서만, 무형적이고 가변적인 순간들을 통해서만 혜언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몸을 마구 흔들며 비틀기춤을 추는, 해석하기 어려운 순간에만 말이다. 평생 김혜언을, 김혜언의 죽음을, 김혜언을 잃은 어머니의 행동들을, 김혜언을 잃은 자신의 마음을, 김혜언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의 말을 해석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 김다언은 언어나 해석이 아닌 순간과 포즈 속에 잠시 몸을 맡긴다.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2. 이름

이름이라는 용기container


"언니 이름은 원래 혜은이였대요. 김혜은. 언니 이름이 혜은이였으면 내 이름은 다은이가 됐겠죠."

다언은 끊임없이 혜언과 자신의 이름이 결정된 순간을, 그 이유를 말한다. 위의 대사는 연극 내내 반복된다. 다언의 이름은 혜언의 이름이 결정된 순간 함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혜언의 출생신고를 한 순간에는 생길지 그렇지 않을지도 몰랐던 다언은 몸보다 먼저 자신에게 붙여질 이름의 한 글자를 가졌다.
이름은 그릇이다. 언니의 이름 한 글자가 포함된 이름을 가질 운명을 타고난 다언은 언니를 끊임없이 챙겨야 하는 운명에 처하고, 언니를 절대 잊을 수 없는 운명에도 처한다. 가족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돌림자가 다언에게 형벌처럼 얹혀 있다. 다언의 삶의 한 자락은 혜언의 출생신고와 함께 결정되었다. 다언에게 언니의 그림자는 언니가 죽은 순간이 아니라 언니가 존재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드리워진 것이다. 이름은 얼굴을 비롯해서 성격과 성향까지 아무것도 닮은 것이 없는 자매를 하나로 묶어준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언에게는 혜언을 사랑할 의무가 생긴다.

본래 혜언의 이름이 될 뻔한 이름, 혜은은 혜언이 죽은 뒤 혜언의 어머니에게 절대적인 것이 된다. 혜언의 어머니는 이름이 가진 주술적 효과를, 이름이 운명을 결정한다는 오래된 미신을 맹신하기 시작한다. 혜언의 이름이 혜은이었다면 혜언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가정법원에 가서 이미 죽은 혜언의 이름을 고쳐달라는 개명 신청서를 내고, 개명신청이 기각되자 온 집안의 문서를 다 뒤져 혜언의 이름을 찾아 일일이 혜은이라고 고친다. 이름은 살아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분해 부르기 위한 이름이다. 그러나 다언과 어머니를 일생 지배한 이름은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을 고치는 행위는 다른 이름이었다면 죽은 이가 죽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덧없는 몸부림이기도 하고, 죽은 이를 잃은 사람을 무위하나마 위로해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가정법원에서 개명신청을 기각당한 다언의 어머니는 오열한다. "우리 딸이 죽었다는데, 딸이 죽었는데 그것 하나 못 해줘요" 절대적이고 잔인한 진실, 사람이 죽었고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진실 앞에서 사회적 약속을 하나 고치는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이제는 불러볼 일도 없는 이름 한 글자를 바꾸겠다는 게, 사람이 죽었다는데, 뭐 그리 문제될 일이어서 못 해주나 싶다. 죽은 이를 개명하는 일은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고통과 무위함을 언어로 담아내고자 하는 몸짓이다. 어떤 용기에도 들어가지 못할 감정들을, 너무 커다란 파도라서 일상의 모든 일을 멈추고 집 안에 틀어박혀 생활을 모두 정지할 수밖에 없는 커다란 사건을 이름이라는 용기에 우겨넣으려는 무리한 몸짓이다.

한편 다언은 자신의 얼굴에서 언니의 얼굴을 찾아내려는 어머니의 시도를 읽고, 언니 사진을 들고 가 성형수술을 감행한다. 수술은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다언은 이름 한 글자가 겹치는 만큼은 언니와 닮은 얼굴을 가지게 된다. 이름이 얼굴을, 언니를 담는 그릇이 된다.


또한 혜언의 이름은 그 근원부터가 혜언의 본질을 담고 있다. 모두에게 오해받는 혜언, 아무에게도 본질을 보여준 적이 없는 혜언의 근원은 잘못 불린 이름으로부터 출발했다. 본래 혜은이 될 것이었던 혜언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아버지를 가진 덕분에 혜언이 된다. "어차피 애 아빠가 계속 혜언아, 혜언아 하고 부를 건데 그냥 혜언이라고 해도 좋겠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가진 것부터가 아버지의 잘못된 발음 때문에 얻게 된 이름이라니. 아버지는 자신의 발음에 관해 설명하거나 부연한 적이 없고, 고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노력 없는 현상 유지가 혜언의 이름을, 혜언의 분질을 만들었다. 그 아버지는 혜언을 끔찍하게 사랑하다가 혜언이 일곱 살, 다언은 다섯 살 때 교통사고로 숨진다. 아버지의 의도는 없는, 갑자기 개입한 트럭 때문에 두부를 다쳐 죽는다. 아버지와 혜언의 죽음은 닮아 있다. 갑자기 개입한 사고로부터 자기방어 없이 죽었다. 

혜언의 이름은 아버지의 '말'로부터 비롯되었다. 또한 '언'자는 그 글자대로 말씀 언言을 연상시킨다. 말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진 이가 자기를 말하지 못해 겹겹이 쌓인 오해 속에서, 침묵 속에서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 무대

타임라인은 직선으로 흐르는가?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무대는 정연하다. 조금 긴 암전이 끝나면, 길고 두꺼운 가로줄 무늬가 정연하게 그어진 무대 바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줄무늬에 맞추어 몇 가지의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2인용 가죽 소파와 길고 둥근 등받이를 가진 일인용 나무 의자, 푹신해 보이는 일인용 소파와 거실 텔레비전 맞은편에 놓여 있을 것 같은 아담한 소파, 가죽 쿠션이 대어진 의자들이 줄무늬를 벗어나지 않고, 무대의 가운데 부분을 비운 채 양옆으로 정연하게 늘어서 있다. 의자들이 보는 방향은 모두 다르지만 줄을 벗어난 의자는 없다. 조명이 무대를 비추면, 바닥에 그려진 줄무늬들이 줄무늬가 아닌 바닥과 다른 색깔을 받아 빛나면서 줄무늬와 줄무늬가 아닌 곳을 구분짓는다. 무대 바닥의 굵은 줄무늬들은 타임라인Timeline을 연상시킨다. 한 단체의 역사를 정리할 때 그어 놓고 시간 순서에 맞춰 줄을 긋거나 서로 다른 색을 칠하며 사건을 표시하는 도표 같다. 인물들의 동선은 양 옆에 의자들을 줄세우고 그 가운데에서 엇갈린다. 어린 시절 문제집에서 자주 보았던 "어울리는 것끼리 연결하시오" 문제가 떠오른다. 두 열 사이를 마구 뒤엉키며 연결하는 선들처럼 인물들은 의자와 의자들 사이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의자엔가 자리를 잡고, 다시 일어나서 돌아다닌다.

이름이 몸을 담는 용기라면 무대는 극을 담는 용기다.

정연한 무대와 정연하지 않은 인물들의 대비가 이 작품과 잘 어울린다. 무대는 시각적인 소설이나 대본 같다. 언어로 오래 설명할 것들을 한 장의 그림이나 한 장면의 시연으로 붙들어둔 것 같다. 여기에 덧붙여 극장의 원형극장 형태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관객은 정연하게 정돈된 무대를 내려다보고, 거기에서 뒤엉키는 인물들을 문제 풀듯 눈으로 좇는다. 무대의 사면이 막혀 있지 않아 타임라인이 끝없이 연장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사각형의 무대 자체가 어떤 커다란 타임라인에서 뚝 떨어져 나온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혀 정연하지 않고,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여러 명의 기억들이 동시상영되며, 인물 각각이 상호작용이나 순서 없이 각자 뱉어내는 말들을 모두 받아 삼킨다. 무대는 이 작품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정돈되어 있는 곳이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인물들이 사용하고 있는 무대 부분에만 조명이 비추는데, 그러면 그 사각형 무대에서 또 필요한 부분만 사각형으로 잘라낸 것 같은 효과가 생긴다. 사각형 속에서, 사각형에 가둘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흐르고 넘친다. 사각형이 품을 수 없는 대사들은 대부분 짧고 긴 침묵 속에서 오래 굳고, 그러다가 끝내 정리되지 못하고 튀어나온다.
 



終. 말, 언어, 시詩

(사진 제공: 남산예술센터)

세상에 내던져진 순간부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으로 무엇도 하지 않는 생명체, 그러나 빼어나게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으로 주변의 모두를 매혹하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진저리나는 이해할 수 없음과 이해하고 싶지 않음의 대상인 사람이 김혜언이다. 동생 김다언에게는 끊임없이 챙겨야 하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 욕구를 돌보아 주어야 하고, 모습이 정연한지 살펴야 하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을 넘어서는 곳에 있는데도 자신이 그래야만 하기 때문에 진저리가 나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방기해 버린 존재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존재, 자신의 얼굴과 자신의 존재로만 말하고, 그러므로 타인에게 끊임없이 오해되고, 스스로 설명하지 않았는데 타인의 내부에서 타인에 의해 설명되어버리는 존재다.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속옷도 입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크리스트에게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유혹하려 한다고 해석된다. 스스로는 그 사실에 대해 아무런 부연도 하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반반한 것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공부를 못하고, 결국 머리가 텅 비었다는 판정을 받고 만다.

 김혜언의 이러한 속성들은 말의 속성이다. 김혜언은 실체화된 언어다. 언어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정제된 언어는 더욱 그렇다. 나의 언어를 세상으로 내놓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이 고정되므로 끊임없이 살피고 검열해야 하지만, 오롯이 책임을 지는 것이 버겁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내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이 말을 수용할 청자들의 책임일 뿐,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던져버리는 존재. 그리고 그 순간 비극은 찾아온다.

이런 맥락에서 시를 썼던 상희의 존재와 시를 쓰고 싶어하는 다언의 존재는 맞닿는다. 시를 쓰는 상희는 학교 교실에서 혜언을 보자마자 그 완벽한 아름다움에 할 말을 잃는다. 상희의 언어는 혜언을 찬미하는 데 바쳐진다. 혜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혜언의 외모에 매료되고, 그 외모를 묘사하는 데 자신의 언어를 바친다. 다섯 살 때부터 끊임없이 혜언을 챙겨 온 다언은 그 존재에게 진저리를 낸다. 다언은 혜언을 쫓아다니는 존재, 아름다운 몸을 놀려 고요하게 도망치는 혜언을 쫓아 소리를 지르고 팔을 휘두르며 돌진하는 존재다. 그들 둘 모두에게 혜언은 잡히지 않고, 결국 둘의 머리 위에 그림자만을 드리운 채 혜언은 죽어버린다. 시 쓰기를 포기하고 다언에 대한 관심을 놓지 못하는 상희와 끊임없는 해석의 몸짓을 포기하기까지 먼 길을 돌아와야 하는 다언은 대학 선후배로 문학동아리에서 만나고 글쓰기 교실에서 만나고 마침내 국립도서관 로비에서 만난다. 기록된 언어들로 가득한 곳에서 마지막으로 조명을 받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


소녀의 몸과 소녀의 이름이, 언어와 육체가, 정연하게 그려 놓은 직선의 타임라인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온갖 모양으로 형태를 뒤틀다 마침내 발산하듯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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