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다섯 번 보았다. 돈이 더 많았다면 더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셀린 시아마 감독 특별전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워터 릴리스>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 영화가 고등학생 때 스크린에 파고들 듯 봤던 영화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갔다.
이번 셀린 시아마 특별전에 나온 세 영화 가운데 시놉을 보고 가장 기대되는 것은 <톰보이> 였지만, 사실 가장 보고 싶어서 애가 달았던 것은 <워터 릴리스> 였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건 고등학생 때였다. 잠에서 막 깨다가 밟아서 액정이 완전히 망가진 내 삼성 넷북의 하드 디스크에 지금도 이 영화가 들어 있을 것이다. 위키에 올라온 영화 소개를 보고도 영화의 내용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단편적인 이미지들뿐이었다. 수영장의 푸른 물, 푸른 조명, 도발적인 표정으로 바나나를 먹는 여자아이, 남자애의 입 속에 침을 뱉고 도망치는 여자아이, 그리고 마지막 장면이 기억 속에 있었다. 그 기억만으로도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고등학생 때의 내 기분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추가 회차의 예매가 열리기를 시간을 재 가며 기다려 연극 티켓팅을 하듯이 영화를 티켓팅해서 자리를 잡았다.
열여덟 살 때 나는 주로 프랑스 퀴어영화들을 열심히 찾아서 봤다. <워터 릴리스>를 여러 번 돌려봤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 때 무엇을 느꼈는지는 다 잊었지만, 이 영화가 나에게 그때까지 몰랐던 어떤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는 것만은 기억난다. 그 때 나는 영화를 찍고 싶다고 생각했고, 언젠가 영화를 찍게 된다면 수영장 씬을 꼭 넣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그 때 내가 정확히 어떤 느낌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영화를 그토록 좋아했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신 이제 그 시절로부터 10년이 지난 나의 감상이 있다.
외롭고 혼란스러운 영화였다. 아마 어릴 때는 이 영화에 외롭다는 말도 혼란스럽다는 말도 붙이지 못했던 것 같지만, 머릿속이 뒤엉키는 기분이었을 거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머릿속이 뒤엉키고,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고,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 같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엔 뒷맛이 찝찝하고, 그 명확하지 않은 불분명함이 새롭다고 생각해서 무작정 이 영화에 끌렸을 것이다. 처음 듣는 음악에 반해 “나는 이 음악을 좋아해” 라고 말했다가, 처음 듣는 것에 “좋아한다”는 말을 붙이면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시무룩해서 다른 표현을 찾지 못한 채 가라앉는 기분.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외로움도 혼란스러움도 인생에서 가장 많이, 가장 밀도 있게 느꼈던 시기에, 이 영화는 위로가 되었다.
그 때는 프랑스와 우리나라 청소년들 사이에 한강처럼 넓고 먼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우리나라 청소년이든 프랑스 청소년이든 혼란스럽고 외롭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30분만 가면 바다가 있는 곳에 살고, 햇빛이 어깨를 고른 모랫빛으로 부드럽게 태우는 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 그 시절을 견디는 게 좀 더 쉬울까. 그건 아직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프랑스로 떠난다고 해서 본질적인 외로움이나 혼란스러움이 덜해지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섹스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그 나라에서는 섹스를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고작 그 정도의 차이다. 금지하든 장려하든 섹스가 그 시절을 좀 더 낫게 만들어주냐면, 아마 백 명 중에 아흔아홉 명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진짜로 중요한 건 단단한 지지대다. 그게 부모라면 정말 축복받은 청소년기를 보낸 것일 테고, 부모가 아니라면 친구나 애인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우리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결국은 혼자 떠 있어야 했다. 수련waterlily이 물 위에 떠 있듯이. 기억했던 것보다 더 날카롭고 아픈 영화였다.
***** 아래로는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워터 릴리스>는 지지대 없이 흔들리면서 물 위에 떠 있을 수밖에 없는 소녀들에 대한 영화다. 소녀들의 마음 속에는 동경, 동일화, 동일시, 로맨스, 충동, 무엇보다 안정과 인정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 무리에 섞이고 싶은 욕망은 무엇보다도 강렬하다. 그래서 모두가 다 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하고, 무리 안에서 자신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고 싶어 한다. 마리, 안느, 플로리안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시간을 보낸다. 마리는 또래와 같은 몸을 가지고 싶다. 깡마르고 소년 같은 몸에서 벗어나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는 것이 마리의 목표다. 안느는 섹스를 하고 싶다. 첫 키스를 아직 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안느를 조급하게 만든다. 플로리안은 섹스를 두려워하지만, 남자들 속에서 자신이 가지는 위치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모두의 부러움과 경탄을 받는 얼굴과 몸매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에게는 모든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욕망은 성장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 어디에 속하고 싶은지, 어디에 속해야 할지, 어떻게 변화를 맞이해야 할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소녀들은 어떤 전형에 소속되고 싶다. 정해져 있는 타입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는 것보다 쉽다. 이 나이에 모두가 갖춰야 한다고 생각되는 몸을 갖추는 것. 이 나이에 모두가 한다고 전해지는 성적인 경험을 하는 것. 이상적인 발육과 이상적인 얼굴을 가진 소녀가 당연히 갖춰야 한다고 생각되는 성적인 매력을 갖추고, 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세 소녀도 전형에 자신을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안느는 규격에 맞지 않는 몸이 콤플렉스다. 안느는 뚱뚱하고,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정말로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믿지 못한다. 마리는 깡마른 몸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없지만, 마리의 진짜 문제는 플로리안을 좋아하면서 시작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마리는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을 정체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한편, 플로리안은 무성애자일 가능성이 있다. 영화를 두 번째 볼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플로리안은 남자들과 섹스를 하기를 원한다.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것은 집단 안에서의 인정을 의미하며, 여자친구들의 집단에 섞여들어가지 못하는 플로리안에게 “나쁘지 않은not bad” 남자를 사귀고 그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플로리안은 매번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친다. 섹스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기하려고 원나잇을 하러 가지만, 플로리안이 마리를 데려가는 이유는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마리를 통해 빠져나가기 위해서다. 마리가 차창을 두드리며 두 사람의 섹스를 저지하고, 플로리안을 데리고 잔디밭을 뛰어갈 때, 플로리안이 마리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고마워, 마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플로리안이 그 순간을 정말로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마리의 행동이 플로리안을 구원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플로리안은 남자와의 키스에 관해서 늘 “그 남자는 키스를 못한다” , “ 별로였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마리에게 상처를 줄 때도 플로리안은 마음껏 잔인해질 수 있다. 플로리안은 마리를 불러 키스한 다음 “봤지? 어렵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마리와의 키스도 다른 남자들과 했던 것처럼 그저 견디는 것,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마리의 입가에 남은 플로리안의 립스틱 자국은 입가에 든 멍처럼 보이고, 플로리안의 키스는 마리에게 보상이나 기쁨이 아니라 폭력과 상처가 된다.
그렇게 결말부에서 세 소녀는 모두 상처를 입고 각자 혼자가 된다. 안느는 프랑수아가 원하는 것이 자신에게 성적인 욕망을 푸는 것일 뿐임을 깨닫고 프랑수아의 입 속에 침을 뱉은 뒤 도망친다. 안느는 마리와 함께 파티장을 빠져나감으로써 다시 유년 시절로 돌아가기를, 마리와 함께 있었던 편안한고 온당하며 안정적인 시간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마리는 안느의 부탁을 무시하고, 플로리안을 끌고 나간다. 하지만 플로리안은 마리가 원했던 바로 그 행동, 키스를 해줌으로써 마리의 기대를 처참하게 박살낸다. 혼자 남은 마리는 수영장 물에 입을 씻는다.
그 물은 마리와 플로리안이 몸을 담갔던 물이고, 마리가 처음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자각했던 물이다. 수영장 물은 마리의 상처를 씻어내는 물이면서, 마리가 유년에서 청소년으로 도약했던 물이다. 수영장을 통해 플로리안을 알게 되고, 플로리안으로 인해 유년 세계로부터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그 물로 상처를 씻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물은 플로리안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상처를 씻는 행위와 상처를 후벼파는 행위는 사실 같다. 마리는 물로 뛰어들었다가 물 위로 떠오르고, 뒤이어 안느가 들어온다. 두 소녀는 머리를 맞대고, 다리를 서로 다른 쪽으로 벌린 채, 함께 물 위에 떠 있다. 이것은 합일이면서 동시에 분리다. 두 사람의 발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 이제부터 두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점점 더 적어질 것이고,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고, 두 사람은 함께 있더라도 계속 고독할 것이다. 이것은 플로리안도 마찬가지다. 마리에게 키스한 후 “파티장으로 돌아가겠다” , “위험한 일이 생기면 네가 구해줘” 라고 말하는 플로리안은 모두가 땀을 흘리고 몸을 부딪히며 시끄럽게 떠드는 가운데 홀로 단단한 얼굴로 춤을 추고 있다. 조명은 수영장 물처럼 푸르고, 플로리안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잡아끌었던 마리마저도 밀어낸 후, 혼자 남아 외롭게 춤춘다.
마지막 장면은 상징적이다. 남자아이들이 거리낌없이 몸을 드러내놓고 땀을 흘리며 뛰고 함성을 지르는 동안, 플로리안은 고요하게 굳은 얼굴로 몸을 흔들고, 마리와 안느는 머리를 맞댄 채 고요히 물에 떠 있다. 푸른 조명은 차갑고 명료하다. 남자아이들의 열정적인 모습과 대비되어, 푸른 조명을 받으며 고요하고 막막한 여자아이들의 세계가 떠오른다. 여자아이들의 세계는 끝없는 분화와 독립으로 이루어진다. 남자아이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사교하고, 팬티를 머리에 뒤집어쓰는 괴상함과 서로 몸을 부딪히고 괴성을 지르는 우스꽝스러움으로 하나가 되는 동안, 여자아이들은 집단에 속할 수 없음을, 동일화라는 마법의 혜택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된다. 푸르고 고독해지는 것.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견디게 되고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절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받고 싶었던 것을 받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 마지막에는 혼자만 남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성장이다.
영화는 소녀들의 얼굴을 자주 클로즈업한다. 눈매와 입매에서 우리는 세 소녀 특유의 표정을 읽는다. 세 소녀의 얼굴은 모두 닫혀 있다. 고집스럽고 단단한 마리의 눈매와 굳게 다물린 입매, 나른하고 육감적으로 보이지만 초조함을 애써 숨기고 있는 플로리안의 눈과 입, 조급함을 담고 온 세상을 향해 열려 있지만 이미 거절과 상처를 예감하고 있는 안느의 일그러진 눈매와 처진 입술. 표정이 풀리는 순간은 제한적이다. 셋 중의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표정을 풀고 웃거나 안도하는 소녀들의 표정을 볼 수 있다. 서로의 곁을 차지할 때 플로리안과 마리는, 안느와 마리는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런 편린과 같은 순간들에만. 마리가 플로리안의 샤워기 아래로 비집고 들어갈 때, 플로리안이 마리가 덮어쓴 담요를 함께 두를 때, 안느가 마리를 찾아와 마리의 침대에서 머리를 맞댈 때.
곁을 차지하는 것은 화해의 제스처다. 이것은 갈등을 무시하고 다시 하나가 되자는 내밀어진 손이다. 영화의 마지막 이후에 세 사람이 어떤 관계를 구축하게 될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무한한 상상이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인생의 어떤 힘든 순간에는 일시적으로라도 서로의 곁을 차지할 수 있기를. 성장이 너무 거칠고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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